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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먹방' 넘어서 '술방'... 휘청거리는 요즘 TV

입력
2017.01.03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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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과 탁재훈, 김준현이 진행하는 ‘인생술집’은 스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취중진담을 나누는 토크프로그램이다. tvN 제공
신동엽과 탁재훈, 김준현이 진행하는 ‘인생술집’은 스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취중진담을 나누는 토크프로그램이다. tvN 제공

TV가 ‘술독’에 빠졌다. 최근 들어 먹방과 혼술의 유행을 타고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에서 술 마시는 장면이 예사로 등장하고 있다. 고단한 세상살이를 위로하는 친구이자 진솔한 대화를 위한 매개로 술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TV도 술맛을 알아야 더 공감하면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먹방과 쿡방에서 술과 안주요리는 빠지지 않는 주제다. KBS2 ‘배틀트립’ 같은 여행 예능프로그램들은 세계 술 문화 체험기를 다루기도 했다. 최근에는 출연자들이 술을 마시면서 진행하는 토크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tvN ‘인생술집’은 소박한 동네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스타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콘셉트를 내세웠고, SBS 모바일 콘텐츠 ‘3차 가는 길’은 1차부터 3차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시는 출연자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여과 없이 담았다. 지난해 방영된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경우 군침 도는 혼술 장면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드라마를 보다가 음주 욕구를 참지 못하고 결국 혼술을 했다는 시청 평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이 자칫 음주를 미화하고 과도한 음주 문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죄악시되는 흡연과 달리 음주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관용적인 사회적 시선을 고려했을 때 ‘술 마시는 프로그램’은 더 위험할 수 있어서다.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가수 김건모가 소주병 300개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에 ‘멋있다’는 자막이 붙었고, MBC ‘나 혼자 산다’에는 혼자 사는 연예인이 지인들을 집에 초대해 가볍게 술자리를 즐기는 일상 풍경이 종종 담긴다. 드라마의 음주 장면은 시청자들이 연출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시청하지만, 예능프로그램에서의 음주는 ‘실제 상황’이라 정서적 몰입을 강하게 이끌고 그만큼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대한보건협회 방형애 기획실장은 “관찰형 예능에서 보여지는 스타들의 소박한 술자리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나와 다르지 않다’는 친근함을 느끼게 해 동질화가 많이 일어난다”며 “어린이나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에게서도 모방 행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방 실장은 “더 나아가 스타의 음주습관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음주습관을 정당화하게 돼 과음을 유발하거나 술을 잘 마시는 것이 능력인 것처럼 잘못 인식할 수 있어 우려가 된다”고 말했다.

‘미운 우리 새끼’에서 김건모와 김종민이 소주병 트리를 완성한 후 축배를 드는 장면. SBS 방송 캡처
‘미운 우리 새끼’에서 김건모와 김종민이 소주병 트리를 완성한 후 축배를 드는 장면. SBS 방송 캡처

특히 혼술에 대한 묘사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혼술을 할 때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거나 술을 정말 좋아한다는 동기가 작용하는데, 이 두 가지 요소가 알코올 중독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혼술은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고 주변의 제재가 없어 쉽게 과음에 이를 수 있다. 방 실장은 “사회적으로 음주 폐해가 심각한 만큼 방송에서도 음주 장면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해외에선 술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에 대해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영국은 ‘주류 광고에 유명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방송협회 윤리규정을 시행하고 있고, 독일과 프랑스는 주류 광고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미국도 스포츠선수의 주류 광고 출연을 금지하고 있어서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들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주류 광고에도 나올 수 없다. 그러나 한국에선 인식이 정반대다. 이효리, 김태희, 싸이, 아이유, 빅뱅, 전지현, 송중기 등 당대 최고의 스타만이 주류 광고에 출연할 수 있다. 주류 광고에 모델로 발탁됐다는 사실이 대중적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헐거운 방송심의도 문제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에는 ‘방송이 음주, 흡연, 사행행위, 사치 및 낭비 등의 내용을 다룰 때에는 이를 미화하거나 조장하지 않도록 그 표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28조)거나 ‘어린이와 청소년이 흡연 음주하는 장면을 묘사해서는 안 되고 내용전개상 불가피한 경우에도 그 표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45조 4항)는 규정만 있을 뿐 엄격한 규제 조치는 마련돼 있지 않다. 개별적으로 안건이 상정되면 심의위원들이 프로그램의 전체 맥락에 비춰 음주와 흡연 장면의 문제 여부를 판단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방송심의규정상 음주와 흡연은 동일한 규제 적용을 받고 있다”며 “흡연의 경우 그 폐해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제작자들이 자율적으로 표현에 제한을 두고 있지만, 음주의 경우 아직까지 부정적 인식이 강하지 않아서 자율 규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음주 장면이 방송에 노출되는 빈도가 잦아져 한층 더 주의 깊게 모니터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진도 음주 장면이 시청자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모르지 않는다. ‘3차 가는 길’은 음주 장면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자막으로 알리며 청소년의 시청 자제를 권고한다. ‘인생술집’은 음주 장면이 많이 포함된 1, 2회 방송에 ‘19세 시청가’ 등급을 매겼고, 본방송은 물론 재방송도 ‘청소년 보호 시간대’를 피해서 내보내고 있다.

‘인생술집’의 연출자 오원택 PD는 “술을 일종의 식도락처럼 즐기는 최근의 문화를 프로그램에 반영했다”며 “술자리의 진솔한 분위기를 지향하되 음주를 조장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 의식을 견지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오 PD는 “음주 문화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담론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다”며 “‘인생술집’이 바람직한 음주 문화에 대해 시청자들과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3차 가는 길’은 제목 그대로 스타들의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SBS 제공
‘3차 가는 길’은 제목 그대로 스타들의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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