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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귤이 배달된 저녁

입력
2017.01.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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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에서 아침 10시 사이에 반드시 잠을 자야만 하는 나의 습관을 변명하다가 시작된 이야기였다. 나는 그 시간에 잠을 못 자면 하루 종일 무슨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그래서 평생 출퇴근하는 직장에 다니지 못했고, 그래서 평생 넉넉하지 못하게 살았고, 그래서 쉰이 넘어서도 내 집이라는 게 없지만, 지금 내 삶에 큰 불만은 없어. 게으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해.

동네 이웃이기도 하고 친구의 친구로 만나기도 한 이들이 우연히 한 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한때 식당을 운영한 적이 있는 친구가 솜씨를 발휘했다. 바닷가에 사는 친척이 보내 준 싱싱한 해물이 주재료였다. 오징어를 맵게 볶고, 낙지와 배추와 버섯을 넣어 맑은 탕을 끓였다. 우리는 몇 달 전까지 작은 카페였던 공간에 앉아 있었다.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았지만 이른바 권리금이라는 것을 회수하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전직 카페 주인은 팔리지 않아서 남아 있던 백포도주를 땄다.

매일 출퇴근하면서 열심히 살아도 자기 집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잖아요. 나보다 한참 젊지만 20대 중반부터 10년 이상 직장을 다닌 친구가 말했다. 물론 나는 부모님이 진 빚을 갚아야 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투 잡, 쓰리 잡을 갖고 일했어요. 지방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어머니께 사드렸고요. 맞벌이를 하면서도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지는 못했어요. 누구 말대로 알뜰하지 않은 탓인가요?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고 이따금 여행을 다니기도 해서?

친구가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폰 벨이 울렸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요. 그냥 대문 앞에 놓고 가주세요. 택배 기사의 전화였다. 제주도로 여행 간 친구가 귤 한 상자를 사서 보냈다고 했다. 그나저나 우리 집까지 귤 한 상자 들고 올라오느라 힘 좀 쓰셨겠네. 전화를 끊고 친구가 말했다. 친구의 집은 꽤 길고 가파른 계단 끝 막다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택배 기사가 귤 상자를 얕은 담장 안으로 넣어 주고 간다고 했다고 하자, 귤이 깨졌으면 어떻게 하냐고 다들 걱정을 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자기 집이 없었다. 몇몇은 과하게 비싼 월세를 내면서 살고 있었고, 나머지는 전세살이였다. 전직 카페 주인은 여전히 우리가 앉아 있는 공간의 임대료를 매달 내고 있는 처지였다. 재산을 늘리려면 반드시 집이나 땅을 소유해야 하고, 부동산 임대료나 시세 차익을 챙겨야 한다는 게 무너질 수 없는 상식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1970년대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내 집 마련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라니.

오징어 볶음은 간이 딱 맞았고, 푸른 배춧잎이 듬뿍 들어간 탕국은 시원하고 달았다. 모두들 감탄하며 먹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귤이라고요? 마을버스 종점에서 좀 더 올라가셔야 하는데, 그 골목으로 차는 못 들어가요. 전화를 끊고 친구가 한숨을 쉬었다. 저 택배 기사 운 더럽게 없네. 너희 집 올라갔다가 우리 집으로 오다니. 사람들이 웃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더라. 친구가 중얼거렸다. 다음에 이사할 때는 반드시 집 앞까지 차가 들어가고 주차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 사람들이 또 웃었다. 허허롭게, 그냥.

늦잠 자는 습관을 체질이라고 우기는 나의 변명과, 새벽에 일어나 늦은 저녁까지 산동네를 도는 택배 기사의 일과와, 멀리 제주도에서 날아온 귤 한 상자의 호의가 뒤죽박죽 어긋나고 있는 사태 속에서, 나는 아무리 해도 설명이 안 되는 무엇인가를 설명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 사이에 전직 카페 주인이 아껴두었던 붉은 포도주 한 병을 더 가져왔다. 얕은 죄책감인지 방치해 둔 억울함인지 누적된 피로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두통처럼 밀려왔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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