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작 | 고민실 ‘쓰나미 오는 날’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소설 당선작 | 고민실 ‘쓰나미 오는 날’

입력
2017.01.02 04:00
0 0

객실에 아무도 없다. 형석은 그 사실을 동대구역에서 알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선반이 텅 비어 있었다. 평일이라지만 연휴 전날이었다. 카페 칸은 말할 것도 없고 열차 연결 통로까지 늘펀하게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엇갈려 뻗은 다리를 피해 걷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휑한 통로가 낯설었다. 화장실에서 지린내 대신 소독약 냄새를 맡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옆 객실을 기웃거려도 검은 무덤처럼 솟아오른 머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몇 십 명이 공유하던 공간을 혼자 독점하는데 오히려 숨이 찼다.

제자리로 돌아오자 창밖에 붉은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플랫폼 가장자리에 핀 들장미가 몰려 앉은 토끼 떼 같았다. 열차가 움직이면서 붉은 눈동자가 일제히 이쪽을 노려보는 기분이었다. 역사를 빠져나가고 탁 트인 전경이 드러났을 때 형석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왼편의 사차선 도로와 오른편의 이차선 도로 상행선이 화물차로 꽉 차 있었다. 이삿짐센터 전화번호가 박힌 일 톤 탑차가 가장 많았다. 장롱이며 이불 보자기며 그릇을 담은 바구니를 그물로 덮어 굵은 끈으로 동여맨 파란색 트럭도 자주 보였다. 간간이 섞여 있는 승용차는 세간살이를 실은 트렁크를 활짝 열어놓은 채 움직거렸다. 텅 빈 하행선은 길게 늘어뜨린 짐승의 혓바닥처럼 뜨거운 김을 쏟아냈다. 그 위로 짐을 싣지 않은 용달차가 휙 지나갔다. 하얀 차체가 누런 공기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다리를 지날 때까지 창밖을 응시하다가 방음벽을 지나는 순간 후회했다. 진작 누울 걸 그랬다. 부산역까지는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형석은 신발을 벗었다. 다리를 뻗어 통로 건너편 의자에 얹었다. 이른 더위에 땀이 배서 양말이 꿉꿉했다. 미끈거리는 발가락을 움직이다 천천히 머리를 내렸다. 부드러운 시트에 등이 먼저 닿았다. 뱃살이 옆구리로 흘러내리며 불룩 튀어나온 배가 평평해졌다. 두 손은 포개서 가슴에 얹었다. 머리 위 반투명한 초록 선반에 검은색 백팩이 비쳐 보였다. 출장을 갈 때면 맘 편히 눈을 붙일 수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거래처에서 독촉 전화가 오지 않았다. 목뼈에서 엉덩이뼈까지 틈틈이 박혀 있던 긴장이 빠져나갔다. 곧게 편 허리가 시원했다. 형석은 눈을 감았다. 그날만 아니라면 쾌적한 여행이 될 뻔했다.

오늘은 부산에 쓰나미가 오는 날이다.

부산역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제시간에 못 오거나 취소하는 표가 있기를 기다리는 대기 줄이었다. 제일 앞쪽에 선 부부가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열 번째쯤에서 이십 대 여자가 커다란 캐리어를 붙든 채 사람이 스쳐갈 때마다 미간에 세 줄 주름을 만들었다. 서른 번째쯤에서 줄은 두 갈래로 늘어났고, 곧 세 갈래가 되었다가 이어 꽁무니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로 산만해졌다. 통로가 시끌벅적한 데 비해 식당은 한산했다. 문을 닫은 가게도 보였다. 형석은 베이지색 얇은 점퍼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남색 폴로셔츠에 블랙진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이 복장에 백팩까지 메고 있으니 온통 검정 일색이었다. 형석은 양쪽 어깨끈을 붙잡았다. 백팩이 유독 무거웠다. 지난번처럼 아령을 넣어왔으면 어쩌나 싶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온 기억이 희미했다. 형석은 묵직한 백팩을 한 번 추켜올리고 유리문을 열었다. 더위가 피부에 달라붙어 끈적거렸다.

바깥은 미세먼지를 동반한 황사가 자욱했다. 산허리까지 올라간 주택들이 회색빛 덩어리로 보였다. 일전에 고기 집에서 맡았던 연탄불 연기처럼 매캐한 냄새가 스쳐 갔다. 그 속에 바다 내음이 묻어 있는지 확인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가 대기 속에 가시처럼 녹아 있을 걸 생각하니 더 목이 아팠다. 황사는 저녁때부터 가라앉는다고 했지만 일기예보란 의심하기 좋은 화젯거리였다. 하물며 쓰나미는 일기예보 축에도 끼지 못했다.

쓰나미 예보는 인터넷에서 태어나 인터넷에서만 사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대략 알 수 있었다. 모월 모일 지진이 일어나고 부산 인근에 해일이 밀어닥칠 거라는 이야기가 한 달 전부터 인터넷에 떠돌았다. 우스갯소리로 채어 돌아다니던 정보는 한 번 흐름을 타자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뉴스에서는 거의 취급하지 않았지만 포털 사이트마다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정보일 때는 두루뭉술했던 이야기가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면서 명확해졌다. 믿으면 음모론이고 믿지 않으면 안전불감증이었다. 쓰나미를 이용해 이벤트를 만든 게임이 비난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뛰자 여기저기서 비슷한 콘텐츠가 양산되었다. 인터넷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이면 그림자처럼 그 소문이 끼어들었다. 나중에는 인터넷 창만 열어도 귓가가 시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전화를 한 거래처 담당자는 믿지 않는 쪽이었다. 몇 억이나 되는 장비에 AS할 생각이 없는 거냐고 항의하면 엔지니어가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을 믿는 사람들은 손사래를 쳤고, 소문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시선을 피했다. 부산 출장은 믿지 않는다기보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 반질반질한 모양새로 형석에게 굴러왔다. 산재처리가 되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이었다. 형석은 농담이 아니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농담이 아닌 줄 알면서도 웃은 건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았던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팀장은 선심을 쓰듯 천천히 내려가라고 말했다. 덕분에 고속열차가 아닌 일반열차를 다섯 시간 동안 타고 왔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 끝자락이었다. 역 앞에서 늘 보던 씨앗호떡에 군침을 삼키고 형석은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길 건너 차이나타운에 들를 참이었다. 전부터 텔레비전에 소개된 만두 가게에 가보고 싶었다. 테이블이 3개뿐이라 항상 대기시간이 길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오늘만큼은 욕심을 부려도 될 듯싶었다.

에스컬레이터는 느리게 움직였다. 금속 패널 지붕 때문에 바깥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비릿한 냄새가 났다. 황사 때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생생했다. 먼 거리를 날아와 희석되고 푸석푸석해진 냄새가 아니라 날것의 악취였다. 시야가 채 밝아지기 전에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릴 때에야 스님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품이 큰 검은색 의상을 입은 여자가 나무 조각을 느린 박자로 두드리고 있었다. 일본 같기도 하고 베트남 같기도 한 옷을 입은 여자는 한 명 더 있었다. 따악 딱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에 맞춰 주름진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작년에는 맞은편에 기독교 학생들이 모여서 기타를 쳤다. 현을 퉁기는 소리와 나무 부딪는 소리가 엇갈리면서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복음신문을 나누어주던 남자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할머니를 만나 삿대질을 당하는 모습도 보았었다. 종교의 전시장 같던 광장이 오늘은 적적했다. 포교활동을 하는 사람은 타국의 옷을 입은 여자 둘이 전부였다. 시티투어 버스 정류장에도 사람이 없었다. 광장은 며칠 굶은 위장처럼 허전해 보였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발에 일회용 컵이 채여 날아갔다. 텅 비었다고 생각한 광장에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컵라면 용기가 쓰러진 곳에 날벌레가 날아다녔고, 화단 구석 자리에 토사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먹다 버린 햄버거에는 비둘기가 옹기종기 모였다. 끝이 까만 담배꽁초가 쌀통 속에서 기어 나오는 쌀벌레처럼 곳곳에 널려 있었다. 무심코 밟은 갈색 얼룩이 끈적거리자 형석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걸 포기하고 분수대를 향해 걸어갔다. 물줄기가 높이 치솟을 때마다 공기가 시원해지면서 퀴퀴한 냄새가 줄었다. 분수대 가장자리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튀어오르는 물방울에 회색 티가 젖도록 내버려둔 채였다. 형석이 기침을 하며 다가가도 젊은 여자는 등을 구부리고 앉아 투명한 물줄기만 바라보았다. 어쩌면 올라가는 열차 시간을 기다리는 건지도 몰랐다.

내려오는 차표는 구하기 쉬웠지만, 올라가는 차표는 입석까지 전부 매진이었다. 차가 있다 해도 상황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핸드폰 맵으로 살펴본 상행선 도로는 부산을 중심으로 대구 근방까지 모조리 정체였다. 형석은 노르스름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섬광이 죽은 태양은 정면에서 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그때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핸드백을 품에 낀 채 도망가고 있었다. 젊은 여자는 쫓아가다 말고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늘진 눈은 파리가 꼬인 김밥보다 생기가 없었다. 형석은 손끝을 비비며 열 지어 선 화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쪼그라든 꽃잎이 가까스로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 항상 번잡하던 삼거리에 차가 없었다. 도로변에 운전석이 빈 승용차만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다. 버스는 비틀거리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섰다. 버스정류장에는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형석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 버스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은 한 골목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용이 조각된 기둥을 지나자 붉은 등이 일렬로 늘어선 골목이 나왔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려고 했던 만두 가게도 없어졌다. 유리문에 서울로 이전했다는 안내문만 붙어 있었다. 이사하면서 부딪쳤는지 창문이 거미줄 모양으로 금이 갔다. 가게 안은 어두컴컴했다. 넘어진 의자 사이로 개인지 고양이인지 작은 털 뭉치가 웅크리고 있었다. 어쩌면 쥐새끼인지도 모른다. 목덜미를 데운 열기가 후끈했다. 입술이 말랐다. 골목을 걸어가는 동안 전봇대마다 쓰레기가 수북이 쌓인 걸 보았다. 음식물을 담은 봉투에서 쏟아진 찌꺼기에 하얀 벌레들이 달라붙어 구물거렸다. 골목 끄트머리에서 겨우 영업을 하는 가게를 발견했다. 입구에 사자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가게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오히려 공기가 텁텁했다. 형석은 메뉴판을 보는 체하다가 먼저 온 사람과 같은 음식을 주문했다. 앞사람이 빈 그릇을 두고 일어날 때 짜장면이 나왔다. 형석은 검은 양념이 묻은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씹을 때마다 달콤하고도 짭조름한 맛이 가득 퍼졌다. 식초를 뿌린 단무지를 면발 한입에 한 개씩 집어 아작아작 씹으면서 생각했다. 계약직이 아니었다면, 배가 나오지 않았다면, 머리숱이 많았다면, 차가 있었다면, 젊은 여자는 분수대 옆에 서 있던 남자를 경계했을까. 콧물이 흘러내렸다. 들이마시자 흙냄새가 났다. 형석은 마지막에 계란프라이를 반으로 잘라 짜장 양념을 잔뜩 묻혀 먹었다. 배가 단단해졌다. 차이나타운을 나오면서 지난번 출장 때도 짜장면을 먹었다는 걸 떠올렸다. 혀로 이빨을 훑자 식초에 전 단무지 조각이 튀어나왔다. 시큼한 냄새를 삼키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자 숨쉬기가 편해졌다. 교통카드가 잘 찍히지 않아 뭉그적댔더니 뒷사람이 성급하게 등을 밀었다. 사투리로 짧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빨라 알아듣지 못했다. 부산에 왔다는 걸 그제야 겨우 실감하며 개찰구를 통과했다. 4호선까지 있는 지하철 노선도 아래에서 두 연인이 시시덕거렸다. 형석은 백팩을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았다.

공업 단지에 도착했을 때는 더위가 한풀 꺾여 있었다. 형석은 손에 든 겉옷을 다시 입었다. 거래처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라인 출입 등록은 되어 있어 출입증을 받아 건물 안에 들어갔다. 사물함에 백팩을 집어넣고 스막룸에서 클린복으로 갈아입었다. 외부인 전용의 파란색 클린복을 겉옷 위에 덧입은 다음 끈을 잡아당겨 모자를 바짝 조였다. 마스크를 쓰고, 속장갑 위에 겉장갑을 끼고, 방진화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안전모를 착용하고 에어워시를 한 뒤 라인에 들어갔다. 하얀색 클린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숫자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여기만은 바깥과 다른 공식이 적용되는 것 같았다.

“미칬다. 뭐할라꼬 왔어예.”

장비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클린룸 안에서는 누구나 크게 외쳐야 했다. 잘못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윤경이었다. 손바닥만하게 드러난 신체 부위로는 누군지 알기 어려웠지만, 목소리가 또 하나의 얼굴 노릇을 했다. 거래처 담당자 대신 장비 상태를 알려주곤 하던 여자였다. 형석이 부산에 온 걸 잘못됐다고 말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고장 난 나침반처럼 부산을 가리키는데, 그녀만이 홀로 다른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어머니는 쓰나미가 오는 날을 몰랐다. 온종일 김밥을 말고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잠이 드는 생활에서 인터넷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건 사흘 전이었다. 사모와 싸우고 김밥 가게를 그만뒀다는 말에 잘했다고 맞장구치기는 했어도 가슴 한구석이 늪처럼 질척거렸다. 어머니에게는 이미 한 달에 삼십만 원씩 용돈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일자리를 구할 거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러라고도 말라고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형석은 다가오는 윤경을 향해 고개를 끄덕 움직였다. 눈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웃을 필요는 없었다. 장비가 다시 멀쩡해지자 담당자가 반차를 냈다고 그녀는 전했다. 적나라한 사투리를 수습하듯 표준어로 바꾸어 말했지만 억양은 그대로였다. 형석은 보이지 않을 미소를 떠올렸다. 열차에 막 올랐을 때는 화가 났던 것도 같은데 이제 그 기억조차 희미했다. 무심코 손끝을 비볐다. 공업 단지를 나가면 광장에서 맡았던 악취로 가득할 것 같았다.

“저녁 같이 묵을래예?”

윤경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케이크 위에 올라간 초콜릿 조각처럼 까만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얇게 곡선을 그리는 걸 보고서야 껌이라도 씹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안에서 시큼 들쩍지근한 냄새가 났다. 교대 시간은 삼십 분 뒤였다. 형석은 서둘러 라인을 나가 안전모와 방진화와 겉장갑과 속장갑과 파란색 클린복을 벗었다. 백팩을 사물함에서 끄집어내고 화장실로 가 양치질을 했다. 팀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대기할지 복귀할지 물어야 하지만, 어차피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팀장에게 간단한 메시지만 남기고 핸드폰을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아 백팩을 다시 추켜올렸다.

교대가 이루어지면서 정문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또 그만큼 들어갔다. 윤경은 하트가 프린트된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뒤통수에서 하나로 묶어 늘어뜨렸다. 작년과 변하지 않은 머리 모양이었다. 형석은 호기롭게 광안리로 회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깔깔대며 웃었다.

“마. 차도 없으면서.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또 걷고. 실어예.”

회가 동하면 근처에 아는 데가 있다며 앞장섰다. 밋밋한 등판에 브래지어 훅이 볼록하게 도드라졌다. 형석은 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그녀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연신 기침을 했다. 안쓰럽다는 듯 지켜보는 그녀 옆에서 당장은 쓰나미보다 황사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공업 단지와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작은 만이 나타났다. 사방을 낮은 언덕이 둘러싸고 있어 썰물로 바닥에 내려앉은 조각배와 짠 내가 아니었다면 자칫 호수로 보일 법한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삼십 분을 왔을 뿐인데 이미 부산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다른 도시로 옮겨갈 수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윤경은 장어구이 가게와 이웃한 가건물로 형석을 안내했다. 먼저 온 승용차가 입구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ㄴ자 모양의 건물 외관은 작고 허름했다. 대박 아니면 꽝을 기대하게 만드는 초라함이었다.

비닐을 깐 상에 먼저 밑반찬이 올라왔다. 찐 고구마와 옥수수, 단호박, 삶은 메추리알과 오징어 튀김, 양배추 초무침, 파프리카와 백김치, 해물전이 툭툭 깔렸다. 제철이라며 한 접시 내어준 멍게는 짭짤한 물 뒤로 미끄러져 나온 살에서 단맛이 났다. 맥주를 마시며 찬그릇을 몇 개 비웠을 즈음에 모둠회가 둥근 접시에 빼곡하게 깔려나왔다. 가지런하게 나열된 가장자리에 비해 중앙에는 회가 뭉텅이로 쌓여 있어서 어떨까 했는데, 한 점 먹어보고 알았다. 대박이었다. 형석은 소주를 주문했다. 윤경이 눈웃음치며 맥주잔을 비웠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뒷담화였다. 서로가 알지 못하고 만날 일도 없을 사람들을 주로 불러내 오징어마냥 잘근잘근 씹었다. 형석이 대꾸하지 않아도 그녀는 혼자 떠들고 웃으며 술잔을 비워나갔다. 아귀가 맞는 블록처럼 오늘 같은 날 잘 어울리는 술 상대였다. 교통카드는 오른쪽에 찍어야 한다든지 뜨거운 물은 레버를 왼쪽으로 돌려야 나온다든지 하는 당연한 것을 일깨우는 편안함이었다. 다만 라인에서 일하던 습관 때문인지 가끔 목소리가 커지는 바람에 형석은 그때마다 윤경의 어깨너머를 힐끔거렸다.

실내는 일반 가정집처럼 아담했다. 식사하는 곳과 조리실이 다른 건물로 분리되어 음식을 나르는 아주머니가 슬리퍼를 신었다 벗었다 하며 드나들었다. 장판이 깔린 방에는 상이 5개 놓여 있었다. 입구 맞은편에 에어컨이 매달려 있었고, 벽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형석과 은경은 문 옆에 앉았다. 먼저 온 두 사람은 창문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늙수그레한 남자가 혈연인 것 같지는 않았다. 동그란 턱만큼이나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는 바지정장 차림이었다. 남자는 절반쯤 벗어진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났다. 바짝 말라 주름진 얼굴이 깐깐해 보였다. 남자 앞에만 맥주잔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게 앞에 세워둔 승용차 주인은 여자인 듯했다. 불륜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단번에 사라졌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점잖았다. 대화에서 가끔 어려운 용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대학 교수쯤 되나 싶기도 했다.

그 사이 윤경은 묵직한 비밀을 털어놓듯 목소리를 낮췄다. 하루 지나면 아랫집이 비고, 하루 지나면 옆집이 비고, 또 하루가 지나면 앞집이 비고. 하지만 아침이 되면 가게들은 멀쩡하게 문을 열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출근을 해요. 형석은 왜 떠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여기만큼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요. 아니, 아니다. 그녀는 다시 대답했다. 다시 취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요. 형석이 내민 잔에 그녀가 잔을 부딪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짧게 울렸다. 뱃속에 식어가는 음식이 있다고 알리는 전자레인지처럼. 새벽에 하트를 보내라고 재촉하는 핸드폰 게임처럼. 빈 잔에 술이 고요하게 떨어졌다.

“여자친구는 없어예?”

형석은 대답하기 싫을 때 종종 사용하던 방법을 꺼냈다. 반문했다.

“윤경씨는요?”

그녀는 웃으며 요란하게 손을 휘젓더니 혼자 술잔을 꺾었다. 어느새 소주 두 병이 비었다. 통통한 윤경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형석도 얼굴이 홧홧해서 점퍼를 벗었다. 백팩 옆에 두려다가 실밥이 풀린 어깨끈이 눈에 띄어 그 위에 올려두었다. 백팩을 좌판에서 집어 들고 셈을 치른 지 벌써 4년이었다. 군데군데 얼룩이 지거나 보풀이 일어서 출장 갈 때마다 내버리고 새로 사야지 하면서도, 돌아오면 다시 옷장 안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다. 편하고 무난한 옷을 찾다가 입게 된 폴로셔츠처럼 백팩도 어느덧 일상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익숙한 나머지 가끔 엉뚱한 물건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아령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먹다 남은 치킨이나 과도가 나온 적도 있었다. 라인에 들어가기 전에 발견하지 않았다면 경비원에게 곤욕을 치를 뻔했다. 이번에는 뭘 가지고 온 걸까. 백팩을 다시 짊어지고 걸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 어깨가 뻐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잘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숙박시설 대부분이 비어있을 터였다. 80%까지 할인하는 호텔도 보았다. 평소에 없던 선택권이 생기니 공연히 으쓱해졌다. 오늘도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대로 하루가 지나면 내일은 열차표를 취소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세상에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팀장이 어떤 표정을 하고 앉아 있을지 궁금했다. 형석은 손을 들어 소주를 추가했다.

쓰나미는 상관없어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그쪽을 보다가 안쪽 볼을 깨물었다. 뜨끈한 액체를 삼키고 혀끝으로 문지르니 잘려나간 살점이 너덜거렸다. 물을 입안에 머금고 우물거리다가 넘겼다. 말끔해진 입안에서 다시 피 맛이 났다.

일없이 논 게 일 년이니 십 년을 일한 사람들도 못 버티는 거죠. 이참에 뿌리를 뽑아 떠나는 거예요.

여자의 말이 계속되었다. 남자는 맥주 한 병을 아직까지 마시고 있었다. 이따금 의미가 없는 짧은소리를 내뱉을 뿐 말이 없었다. 여자는 젓가락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회는 대부분 남자가 먹었다. 마치 여자의 말을 들어주는 대가 같았다.

형석은 회를 두 점 집어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처음 먹을 때의 감동이 가시자 어디선가 먹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열다섯 번째 이력서에 연락이 없을 때였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여자친구와 부산에 왔다. 열차 통로에서 저린 다리를 두드리며 줄곧 수다를 떨었다. 꿈이라든가 버킷리스트라든가 아름다운 풍경이라든가 사랑에 대해 말했던 것 같다.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을 내려오고도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아픈 데가 없었다. 아팠는데 금세 잊은 건지도 몰랐다. 그때는 잘 잊어야 건강할 수 있었다.

부산역을 나오자 광장 한쪽에 분수대가 보였다. 거대한 도넛 모양 조형물이 가운데 서 있었다. 민트색이었다. 주위로는 손가락을 구부린 모양의 조형물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역시 민트색이었다. 대리석 바닥에서 수십 개의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반바지를 입은 여자아이가 맨발로 찰박거리며 뛰어다녔다. 자그마한 발에 채일 때마다 물웅덩이에 파도가 일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미소를 띤 얼굴로 아이를 응시했다. 때로 손을 흔들기도 했다. 아이 엄마와 분수대를 지나쳐 급히 택시를 잡았다. 영도대교에서는 벌써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리가 반으로 쪼개져 올라가는 걸 지켜보다가 BIFF 광장까지 걸어갔다. 몇 번이나 빨아 신어 땟물이 든 캔버스화가 나란히 박자를 맞춰 움직였다. BIFF 광장 입구에서 거침없던 발걸음이 멈췄다. 영화의 거리는 도떼기시장 같았다. 중국어와 일본어와 영어가 마구 뒤섞여 들려왔다.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입구부터 다음 골목까지 촘촘히 늘어섰다. 음식 이름을 프린트한 현수막이 파라솔마다 때로는 사진과 함께 매달려 있었다. 기름진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입술이 눅진해졌다. 본래 핸드프린트를 보고 씨앗호떡만 먹을 계획이었는데, 국적을 알 수 없는 온갖 음식에 현혹되어 버렸다. 감자 겉에 바비큐소스를 발라 구운 스카치에그 바베큐, 딸기와 포도 위에 설탕 시럽을 잔뜩 입힌 탕후르, 구운 옥수수에 소스와 치즈 가루를 듬뿍 뿌린 마약옥수수는 물론이고, 나룻배 모양의 종이 접시에 담긴 투명한 물방울 떡까지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도중에 여자친구가 말렸지만, 다시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절박해졌다. 하나를 입에 문 채로 다음 먹을 것을 찾아 흘깃거렸다. 낯선 향과 이름과 색깔이 네온사인처럼 깜박거렸다. BIFF가 아니라 BEEP일지도 모른다고 부푼 배를 껴안고 헐떡대며 웃었다. 이대로 자갈치시장에 갔다가는 비위가 상할 것 같아 곧장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몇 정거장 지난 뒤에야 핸드프린트를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쉬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는 해운대에 있었다. 비수기라 전망 좋은 방을 여유 있게 차지할 수 있었다. 해운대에 모인 사람들은 백사장에서 바다만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파도를 쫓다가 도망쳤다가 하며 깔깔거렸다. 끈적거리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구불거리며 오던 수면이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킬 때마다 장난감 블록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을 펴듯이 모래사장을 기어오르던 물거품은 경계만 그리고 사라졌다. 여자친구는 샌들을 벗고 아이들 무리에 끼었다. 발이 시리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거듭 손짓해 불렀다. 그때마다 형석은 고개를 저었다. 경계 밖에서 운동화를 적시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그럼에도 한 번 크게 밀려온 파도에 신발 끝이 젖었다. 양말에 스며든 바닷물 때문에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발가락이 퉁퉁 불었다. 부산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되지 않아 형석은 지방의 연구단지에 취업했다. 여자친구는 그 뒤로도 일 년 가까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1년인지 2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쯤 되어 헤어졌으니까. 타지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워 여자친구의 자괴감을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가 계약직으로 일하는 불안을 여자친구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핸드폰이 개인용에서 업무용으로 탈바꿈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일인용 식판에 익숙해진 뒤였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작은 창문으로 붉은빛이 번졌다. 노을을 제대로 본 게 언제쯤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혼자가 되어도 불편한 점은 없었다. 주위에는 볼거리가 넘쳤고, 일주일에 두 번은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연차가 되어도 승진하지 못하는 건 연락이 없는 이력서에 전전긍긍하던 시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돌연 상에 컵이 부딪는 소리가 났다. 쏟아진 물이 죽 밀려가다가 상 끝에서 한 방울씩 떨어졌다. 물방울이 장판을 두드릴 때마다 시간이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행주로 바닥을 훔치는 동안 여자가 자세를 바꿔 앉았다.

노사관계는 진작 무너졌어요. 집행부까지 사측에 장악당한 지 오래인걸요.

여자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남자는 말을 하지 않으니 억양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대화의 내용은 끓는 기름 같은데, 어조는 말린 과일처럼 건조했다. 범상치 않은 화제에 기가 죽었다. 세 걸음이면 닿을 곳에 있는 그들이 마치 대양 너머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고향이 어딘데예?”

윤경의 질문에 형석은 울산이라고 대답했다. 윤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바람에 술김에 사실대로 말한 걸 후회했다. 태어난 고향은 의미가 없었다. 어릴 때 이사해 삼십 년을 서울에서 지냈다. 학교를 옮긴 것만 다섯 번이었다. 이사는 더 잦았다. 가장 오래 거주한 지역은 대학가였고, 두 번째가 직장 기숙사였다. 반면 윤경은 울산 토박이였다. 친척 일가들이 대부분 울산에 자리 잡은 데다 학교를 모두 근처에서 다녀, 집에 돌아가면 몇 걸음마다 아는 얼굴을 만난다고 했다. 연애를 시작하면 온 동네에 소문이 나는 건 기본이라며 진저리를 쳤다. 어느 동네에 살았냐고 묻는 말에 형석은 고개를 저었다. 울산에 있었던 건 세 살까지였다. 사투리도 배우지 못한 채 떠났는데 그때 기억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그 이후에 새겨졌다. 서울에 올라와 개업한 고깃집을 깨끗이 말아먹은 다음 아버지는 다시 공장에 나갔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페인트가 묻고 구멍이 난 옷은 때로 까만 기름에 절어 있었다. 나사며 못이며 금속판 같은 것을 들고 왔다가 놓고 나가기도 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그것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면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간암으로 세상을 달리할 때까지 아버지의 냄새는 변하지 않았다.

형석에게 고향이란 태어난 장소라기보다 그 말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어항 속 열대어가 본 적도 없는 태고의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마저도 사라진 건 울산에 출장을 몇 번 다녀오고서였다. 그 뒤로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서울이라고 대답했다. 형석은 술잔을 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맛이 떨어졌다. 윤경은 오늘 사무동에 일 나온 사람이 없다며 불콰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술버릇은 개도 못 준다더니 그녀가 딱 그 짝이었다. 부산 사람이 부산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라인 사람이 거친 말을 쓰는 건 당연하다지만, 그렇다고 갈수록 험해지는 비속어가 듣기 좋은 건 아니었다. 부친이 조기 퇴직하는 조건으로 취업한 사람을 욕할 때는 공중에 팔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형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가죠.

저도 모르게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처음 입을 열었다. 사투리 억양이 밴 표준어였다. 창밖은 이미 검기울고 있었다. 여자가 처음으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쓰나미가 오면 어딘들 안전하겠어요.

남자가 겉옷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보는 드라마가 조금 있으면 시작해요.

여자는 립스틱이 지워진 입술을 달싹였다. 몇 시간을 혼자 말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묵이 입 언저리를 떠돌았다. 회는 절반 가까이 남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밀물이었다.

더 마시자며 떼를 쓰는 윤경에게 다음날 8시 출근을 상기시키자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형석이 먼저 일어나 겉옷을 입었다. 술을 마신 탓인지 백팩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바깥은 낮과 달리 한기가 돌았다. 가로등 불빛에 그녀가 입은 반소매 티셔츠가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운동화에 발을 꿰느라 몸을 숙이자 허리춤으로 속옷이 보였다. 핑크색이었다. 형석은 도로 건너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하늘이고 바다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다. 안개마저 자욱했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불안할 정도로 비틀거리는 소리였지만 형석은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정류장까지는 15분 정도 걸어야 한다.

공기가 축축했다. 아파트 단지가 흐리터분했다. 안개로 둘러싸인 윗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숨쉬기는 편해졌다. 일기예보대로 황사가 물러간 모양이었다. 흙먼지 대신 소금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등 뒤에 달라붙는 파도 소리를 떨치듯 걷는 속도를 높였다. 바닷가를 떠나 조금이라도 뭍 안쪽에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초등학교를 지나갈 때 윤경이 넘어졌다. 형석은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팔을 붙잡고 끌어올리는 도중 백팩이 뒤로 쏠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바지를 털었다. 어스름 속에서 하얀 티셔츠가 공중에 뜬 비닐봉지처럼 실체가 없어 보였다. 형석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등에 스위치처럼 돋아난 브래지어 훅을 문질렀다. 얇은 천 너머로 구부러진 철사가 손가락 끝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미친나. 어데 함부로 손을 가따 대노.”

형석은 주저앉아 발을 감싸쥐었다. 얼마나 세게 발등을 밟았는지 어구구구 신음이 나왔다. 그녀는 한참 욕설을 내뱉다가 등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위태롭게 걷던 모습이 엄살이었나 싶을 정도로 멀쩡한 걸음걸이였다. 연휴가 끝나고 그녀가 라인 사람들과 나눌 대화를 상상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형석은 절뚝거리며 그녀를 쫓았다. 이력서의 숫자를 세던 시절로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아르바이트도 하기 어려운 나이였다.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가까운 건물조차 흐리터분해서 갈비뼈가 비죽비죽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뛰어도 하트가 그려진 하얀 티셔츠를 찾을 수 없었다. 숨이 찼다. 풍경이 자꾸 변해서 멀미가 났다. 얼마 가지 않아 골목길을 끊어내듯 4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주위는 온통 희멀건 안개뿐이었다.

기침이 연거푸 튀어나왔다. 털 뭉치라도 삼킨 것처럼 목이 껄끄러웠다. 몸이 뒤틀리도록 기침을 하다가 결국 먹은 걸 다 게워냈다. 머리에 몰린 피가 겨우 가라앉았을 때에는 팬티까지 축축했다. 형석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콧속이 시큼한 냄새로 가득 찼다. 역한 냄새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백팩이 어깨가 저릴 정도로 무겁게 짓눌렀다.

도로에는 차가 없었다. 공사장 가림막 너머로 노란색 크레인이 이쑤시개처럼 가늘게 솟아 있었다. 버스정류장도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윤경은 보이지 않았다. 형석은 의자에 앉았다. 문득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핸드폰 진동이라는 걸 깨닫고 점퍼 안을 더듬었다. 까만 액정 화면에는 통장에서 카드대금이 빠져나갈 예정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메시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단단한 유리가 손끝에서 미끄러지며 화면이 꺼졌다. 형석은 머리를 긁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덩어리졌다. 손바닥으로 축축한 목덜미를 문지르자 쇳가루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맵에서 버스가 오는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형석은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핸드폰을 껐다.

전원을 다시 켜는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찢었다. 주춤주춤 일어서는데 안개 속에서 불빛이 휙 튀어나왔다. 빨강과 초록의 형형한 불빛은 노려보듯 잠시 멈추었다 순식간에 멀어졌다. 소음이 줄어들면서 눈앞이 침침해졌다. 형석은 까치발을 세웠다. 멀리서 어둠이 안개를 잡아먹으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를 밝히던 불이 사라졌다. 인터넷은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을 서성이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버스가 오지 않아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어깨는 아프지 않았다. 통증을 견디다 못해 신경이 죽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면 백팩은 벌써 옛날에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형석은 눈을 감았다. 열차에서 내릴 즈음 나오던 안내방송이 귓가에 맴돌았다. 잠시 후 마지막역인 부산역에 도착합니다. 낭랑한 기계음은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다시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닫아도 열어도 똑같은 어둠이었다. 밥솥을 열었을 때 갓 지은 밥에서 올라오는 촉촉한 공기가 손끝을 스쳤다. 백사장을 떠날 때 뒤꿈치에 달라붙는 모래알이 뺨을 스쳤다. 혀를 내밀어 공기를 핥았다. 익숙한데 무슨 맛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소지품을 두고 내리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형석은 어깨를 더듬었다. 어디선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2017 한국일보 신춘문예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