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요정’에게는 14년이란 세월의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 대양홀. 그룹 S.E.S는 1997년 낸 데뷔 곡 ‘아임 유 어 걸’을 흔들림 없이 소화했다. 팔을 위로 들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추는 안무는 여전히 경쾌했고, 발랄했다. 운동화에 캐주얼한 의상을 입고 무대를 휘젓는 모습이 꼭 데뷔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나를 믿어 주길 바래 함께 있어~” 바다, 유진, 슈 세 멤버가 추억 속 히트곡을 꺼내자 객석에서는 공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졌다.
경쾌한 안무 그대로 “대형 타임 머신 탄 듯”… 월차 내고 온 회사원들
가요계 1세대 걸그룹인 S.E.S가 ‘리멤버, 더 데이’란 공연을 열고 화려하게 돌아왔다. S.E.S가 다시 모여 무대를 꾸리기는 2002년 팀 해체 후 처음이다. 단독 콘서트는 16년 만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S.E.S와 팬들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꿈을 모아서’를 부르고 관객들에 처음 인사를 건넨 유진은 “보랏빛을 보니…”라며 눈물을 보였다. 팀 상징색인 보랏빛 형광봉을 흔들며 환호하는 관객을 보고 마음이 벅차 오른 것이다. 바다도 “마치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며 “대형 타임머신을 탄 것 같다”며 행복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연장은 S.E.S가 팬클럽 1기 창단식을 열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공연장을 찾은 S.E.S 팬들은 지하철 역 출구에 ‘10대일 땐 학교를 조퇴하고 왔지만 오늘은 회사에 월차 내고 왔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걸어 스타의 귀환을 반겼다. ‘저스트 어 필링’의 멜로디가 흐르자 앉아 있던 관객들은 모두 서 야광봉을 흔들며 추억을 즐겼다.
S.E.S는 단단히 벼리고 무대에 선 눈치였다. 아이 엄마가 된 유진과 슈는 각각 보라색과 노란색 머리를 하고 무대에 올랐다. 유진은 가수 활동 시절 한 번도 머리 탈색을 한 적이 없다. 그만큼 이번 무대에 욕심을 냈다는 뜻이다. 공연 전 몇 달 동안 새벽까지 안무 연습을 했다는 세 사람은 양팔을 좌우로 절도 있게 흔드는 ‘드림스 컴 트루’의 군무도 능숙하게 췄다.
“산 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요정들의 너스레
달라진 건 ‘요정’들의 너스레였다. 소녀에서 엄마가 된 유진은 신곡 ‘캔디 레인’을 부른 뒤 “아이고 더워라”며 땀을 훔쳤고, “롱 부츠가 꽉 끼어 춤출 때 무릎이 안 올라가더라”는 농담도 했다. 세 아이를 둔 슈는 “하이힐을 신고 춤 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아시죠?”라며 넉살을 떨었다. 이 뿐이 아니다. 슈는 “어디서 애들 목소리가 들린다”며 아이를 찾기도 했다. 객석에는 슈의 남편인 농구선수 출신 임효성과 딸 라희가 그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다는 “한국 최초로 여자 아이돌 가수가 아이를 객석에 앉혀놓고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말해 객석에선 웃음이 터졌다. 유진의 남편인 배우 기태영도 딸 로희와 함께 공연장을 찾았다. 한 관객은 멤버들의 아이들 얘기가 끊이지 않자 “네 어머니”라고 응대해 다시 한 번 공연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추억만 있었던 공연은 아니었다. 세 멤버는 “산다는 건 그런 건 아니겠니”라며 세월의 흐름을 팬들과 격의 없이 나눴다. 그룹 여행스케치의 노래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란 노래를 통해서다. 이 무대엔 쌍둥이의 유모차를 끄는 댄서도 등장했다. S.E.S는 ‘리멤버’와 ‘한 폭의 그림’ 등 신곡도 들려줬다.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는 S.E.S는 2일 스페셜 앨범을 낸다. 공연은 31일까지 이틀 동안 열렸고, 4,000여명이 찾았다.
“우리가 뭉친 게 ‘드림스 컴 트루’”… S.E.S 재결합 프로젝트 도운 이수만
공연과 함께 새 앨범을 낼 S.E.S는 공연 직전 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날을 꿈꿨다”고 했다. 바다는 “우리가 다시 뭉친 것 자체가 ‘드림 스 컴 트루’”라며 활짝 웃었다. 팀 활동 중단 후 결혼해 육아에 집중했던 슈에게 특히 각별한 작업이었다. 슈는 “자신감을 잃은 적이 있다”며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 존재감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녹음하고 공연 준비에 너무 빠져들다 보니 ‘난 엄만데’라는 생각을 깜빡 잊기도 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유진은 “S.E.S를 성찰하는 계기였다”고 의미를 뒀다. “활동할 때는 몰랐는데 ‘우리가 각자 다른 빛을 가진 보석인데 합체하니 가장 빛난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는 설명이었다.
해체됐던 그룹이 다시 모여 공연을 열고, 새 앨범을 내기란 쉽지 않다. 세 멤버는 그룹 활동 중단 이후에도 8년 동안 ‘그린하트’ 바자회를 열며 친분을 이어와 재결합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특히 도움을 준 이는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SM) 회장이었다. 국내 첫 걸그룹인 S.E.S를 세상에 내놓은 이 회장은 딸 같은 세 멤버의 새 앨범 제작에 프로듀싱을 해 용기를 줬다. 바다는 “(이수만)선생님이 녹음실에 와서 우리 노래하는 걸 듣고는 ‘이 부분은 좀 길게 처리해줬으면 좋겠는데’라며 챙겨줘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며 웃었다. 이 회장은 S.E.S 앨범 타이틀곡 믹싱 등 후반 작업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SM이 음반 계약 없이 소속 가수가 아닌 이들의 앨범 제작을 맡은 건 이들이 처음이다. SM 관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31일 공연장을 찾아 세 멤버들을 응원했다.
S.E.S가 2일 낼 새 앨범에는 더블 타이틀곡인 ‘한 폭의 그림’과 ‘리멤버’를 비롯해 ‘마이 레인보우’, ‘캔디 레인’, ‘버스데이’ 등 10곡이 실린다. 1989년 이수만이 낸 ‘그대로부터 세상 빛은 시작되고’를 리듬앤블루스 발라드로 재해석해 수록했다. 바다는 “1990년대를 함께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며 “가사에 스토리가 담겨 추억을 공유할 곡들이 많다”며 기대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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