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revolution의 원래 뜻은 회전, 공전이다. 이 단어에 “급격한 사회 변화”라는 의미가 부여된 것은 15세기 중반부터라고 한다. 100년쯤 뒤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과학혁명이 시작되었다. 과학혁명이란 16, 17세기 서유럽에서 근대과학이 태동하여 완성된 일련의 과정이다. 그 시작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으나,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한 1543년이 중요한 분기점임은 분명하다. 이 해에 그의 저작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정도 된다. 이때의 라틴어 revolutionibus에는 정치적 혁명이라는 의미가 없다.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 “천구 회전(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널리 알려진 대로 코페르니쿠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지배적인 우주관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고정돼 있었다. 달과 태양 수성 금성 화성 등이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 붙박이별들은 거대한 구면인 천구(항성천구)에 붙어 하루에 한 번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우주의 중심에 있던 지구가 변방으로 밀려나 태양 주위를 맴돈다. 항성천구가 매일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대신 지구가 자전한다. 코페르니쿠스에서 브라헤와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쳐 뉴턴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과학혁명의 출발점은 ‘단지’ 지구와 태양의 자리를 바꾼 것뿐이었다.
단순한 자리바꿈이 위대한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각자 있어야 할 자기 자리를 제대로 찾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부터 그 진상이 드러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우리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각자의 위치가 얼마나 전도돼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대통령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최순실이라는 비선 실세가 버티고 있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도, 헌법을 준수하지도 않은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청와대를 지키고 있다. 그가 있을 제자리로는 교도소가 더 어울려 보인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 당한 뒤에도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덕분에 주권자인 국민은 매주 광장으로 모였다. 단지 부정한 대통령을 즉시 끌어내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원래 국민의 자리,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비롯되는 주권자로서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주변부를 맴돌았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영화 속 대사는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로 사실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권력의 원천은 군부였고, 재벌이었고, 수구 언론이었고, 부패한 검찰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관계의 모태는 박정희 군사독재였다. 그 후예들은 선거에서 댓글 조작사건을 저질렀고, 이번 청문회에서도 진실을 은폐하는 데에 급급했다. 직장에서 몹쓸 병에 걸린 직원들에게는 한 푼도 쓰지 않던 재벌이 비선 실세를 위해서는 수백억 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구 언론은 박근혜의 ‘아우라’를 위해 기꺼이 백 개의 형광등이 되었고, 부패한 검찰은 김기춘과 우병우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군부, 재벌, 언론, 검찰. 이 4대 거악이 민주공화국의 주인 노릇을 하며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해왔던 역사를 이제 뒤집어야 한다. 원래 이들의 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단지’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시대를 바꿀 수 있다.
병신년의 마지막 광장에서 나는 희망한다. 새해 정유년은 경장(更張)의 한 해가 되기를. 어물쩍 넘어가다 악습이 되풀이되는 순환(revolution)이 되지 말기를, 다시는 거스를 수 없는 비가역의 혁명(REVOLUTION)이 시작되기를.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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