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일까? 모두가 “올해 가기 전에 봐야지” 아니면 “연말 잘 보내고 연초에 날 잡자” 하는 소리를 한다. 꽃피는 3월이나 4월, 아니면 열매 맺는 9월부터 진작 좀 만나뒀으면 좋으련만, 하필 다 연말이고 연시다. 그리하여 12월과 1월 달력에만 반가운 이름이 적힌 약속이 새카맣다. 1년에 한 번이나마 챙겨 만날 이들까지 살뜰히 거둬 만나다 보면 반갑고 들뜨기야 하는 때다. 문제는 우리가 여태껏 할 줄 알고 해봤다는 친목이 거의 술자리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한 해 비축한 주량도 거덜나기 십상이라는 것. 숙취가 난리다. 알코올을 해독해줘야 할 간에서 시작해 온 몸에 빠져나가지 못한 술독이 퍼지고 몸이 갉혀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숙취는 주당의 천형이다. 또한 해장은 구원이다. 그리하여 연말연시의 최대 목표는 아침의 든든한 해장으로 또다시 반가운 사람들과의 긴긴 저녁을 준비할 일이다. 잘 마시고 잘 풀기로 내로라하는 25인에게 평생을 꼽을 ‘인생 해장’을 물었다. 북에서 남으로, 서울부터 제주까지, 그들 경험치로 전국 해장 지도가 그려졌다.
황태 해장국 | 서울 | 대장금 | 윤소윤(포시즌스 호텔 서울 홍보팀)
뽀얀 국물을 낸 황태 해장국을 먹는 순간, 숙취가 확 풀리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덕장에서 바로 들여오는 최상품의 황태로 낸 구수한 국물에 밥을 말면 궁합이 절묘하다. 주인 아저씨의 구수한 사투리에 정신이 번쩍 들고, 넘치도록 한 가득 담아주는 고봉밥이 유달리 정겹다.
해장국 | 서울 | 청진옥 | 황교익(맛 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장이 서던 곳, 무악재를 넘어 온 이들이 땔감을 펼쳐 놓고 팔던 자리가 청진동 해장국 골목이었다. 재개발로 그 골목을 떠나 인근의 신식 건물로 이전한 ‘청진옥’은 내게 평생 인이 박인 해장국 집이다. 광화문에서 10여 년 직장생활을 하던 당시 물리도록 먹었다. 매일 출근하면 청진옥에 가서 해장국으로 속을 풀었고, 저녁이 되면 또다시 개운해진 낯으로 청진옥에 앉아 ‘따구국’(육수 재료로 쓴 살이 듬성듬성 붙은 큼직한 뼈를 모아 내주는 것)을 주문했다.
추어탕 | 서울 | 용금옥 | 김하늘(외식 창업 인큐베이터)
추탕. 양과 곱창을 우린 벌건 국물에 통 미꾸라지가 헤엄치기라도 하듯 펄펄 끓는다. 씹을 때 마다 국물을 내뿜는 유부와 두부, 부드럽게 뭉개지는 추어와 함께 노오란 국수와 밥을 말아 한 뚝배기 해치우면 어느새 등줄기를 타고 ‘술 땀’이 흐른다.
평양냉면 | 서울 | 우래옥 | 이욱정(KBS 음식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이북의 술꾼들은 해장을 냉면이나 그걸 데운 온면으로 한다.” 이북 출신인 선친께 언제나 듣던 이야기다. 그 영향인지 언제나 술 마신 다음날엔 ‘해갈’을 위해 우래옥을 찾는다. 우선 따뜻한 면수로 속을 다스리고, 차가운 냉면 육수로 남아있는 화기를 달랜 후에 면을 잘 씹어 삼키면 갈증이 해소되고 속이 시원해진다. 날에 따라 마포 을밀대를 찾기도 한다.
오이 양장피 무침 | 서울 | 동북화과왕 | 손기은(‘GQ’ 피처 에디터)
과음한 다음날의 해장도 절실하지만, 내겐 1차와 2차 사이의 해장도 중요하다. 다음날 아침의 숙취는 아무리 용을 써도 말끔히 사라지지 않는데, 취중에 잠깐 하는 해장은 꽤 타율이 높다. 창신동 동북화과왕의 오이 양장피 무침은 그 새콤한 소스,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기분이 드는 시원한 오이, 가볍고 매끄러운 질감이 취기를 깨끗이 지운다. 이제 더 길게 마실 수 있다.
복 지리 | 서울 | 부산복집 | 하정석(딩고푸드 연출, 제작)
이 한 몸 불살라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날은 커피로 버티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충무로 부산복집 문을 연다. 해장, 그거야 복 지리 하나만으로 충분히 되는 일이다. 미나리 향과 뒤섞인 맑은 국물을 복어 살과 함께 씹으며 주르륵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 속이 풀린다. 동시에 속이 다 비워진 듯해 밥을 꾹꾹 말아 먹자니 남은 국물이 적다. 핑계 김에 속을 채울 ‘복 껍질’을 시킨다. 쫀득한 식감이 입안에서 번지면, 반 병만 마시자 결심하며 소주 한 병을 시키게 된다.
가정식 백반 | 서울 | 가정식당 | 안상현(안씨막걸리 대표)
술 먹은 다음날 가장 간절한 곳은 내겐 경리단길 뒤편의 가정식당이다. 경리단길에 터를 잡고 ‘독거 생활’을 시작한 지도 이제 꽤 오래된 탓인지 해장을 궁리할 때마다 거창한 메뉴보다는 그저 집밥이 떠오르곤 한다. 세상 법 없이도 살 맑은 얼굴의 ‘어머니’ 두 분이 대단치 않지만 푸근함에 사르르 녹는 밥상을 차려주신다.
해장국 | 서울 | 유명국양평해장국 | 김설아(신세계 L&B 마케팅 파트장)
술을 마시면 어김 없이 탄수화물과 국물이 당긴다. 신사동 유명국양평해장국에서 매운 국물에 고추 다대기를 넣으면 해장과 동시에 음주를 행할 수 있다. 해 뜰 때까지 취하지 않고 끝 없이 마실 수 있는 무한동력이랄까. 반찬으로 내장수육을 시키면 남의 내장으로 내 내장이 다스려지는 일도 경험할 수 있다.
소고기 쌀국수 | 서울 | 리틀 사이공 | 백문영(‘럭셔리’ 푸드/드링크 에디터)
소주로, 맥주로 그리고 와인으로 각종 주류를 섞어 '달린' 다음날 가장 절실한 것은 국물이다. 리틀 사이공의 소고기 쌀국수(퍼보 Pho Bo)는 쇠고기 양지를 오랜 시간 끓여 내 진하면서도 묵직한 국물 맛이 일품인 '마법의 국물'이다. 매운 베트남 고추를 듬뿍 넣어 쌀국수와 고기 한 젓가락 먹고 베트남식 튀긴 만두인 짜죠를 땅콩 소스 듬뿍 찍어 먹으면 취기가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평양냉면 | 서울 | 진미평양냉면 | 조소현(‘보그’ 피처 에디터)
해장이란 또 다른 자아가 끊임 없이 집어 먹은 온갖 음식을 걷어내는 과정이다. 진미평양냉면 육수는 입안에 남아있는 간밤의 그 복잡한 맛을 하나로 정리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풍부하지만 일관성 있는 시원한 육수를 들이키는 과정을 통해 전날 고생한 위와 내장 그리고 입 속은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선지 해장국 | 서울 | 중앙해장 | 문인영(파크 하얏트 서울 홍보팀)
삼성동에 회사를 둔 자로서 단연 중앙해장을 꼽겠다. 이름만 들어선 허름한 해장국집을 떠올리겠지만, 그 반대다. 깔끔한 외경과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그리고 가격에 걸맞은 맛과 퀄리티까지 모두 만족스럽다. 특히 24시간 영업을 하기 때문에 출근 전 들르기도 제격이다. 식육 유통을 하는 곳에서 운영하는 곳인 만큼 고기, 곱창, 부속물의 질은 두말 할 것 없이 최고다. 누린내 없는 깔끔한 선지 해장국에 고추 다진 것을 풀어 칼칼하게 먹으면 하루가 상쾌하다.
온 소바 | 서울 | 미나미 | 김호윤(요리사)
교대 근처에 있는 소바집, 미나미는 원래 절인 청어가 통째로 올라간 ‘니싱 소바’나 ‘튀김 소바’ 등 메뉴가 맛 좋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미나미는 인생 최고의 해장 식당이다. 이 집의 메밀 면은 입 안에서 가볍게 부서지며 진하고 따뜻한 다시 국물과 함께 깔끔하게 넘어간다.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봉골레 파스타 | 분당 | 벨라로사 | 정재훈(약사/푸드 라이터)
땀을 뻘뻘 흘리며 마지막 조개 하나까지 남김없이 비우고 나니 봉골레 파스타야말로 해장에 완벽한 음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게 있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지 알려면 연구가 필요하다. 더 많이 먹어봐야겠다. 먼저 술을, 그 담엔 봉골레 파스타를.
섞곰탕 | 고양 | 평양관 | 정태겸(여행작가)
경기 고양시 대자동 평양관은 잘 알려지지 않은 집이지만 해장의 명소로 권할 만하다. 잘 삶아진 수육과 진하게 우려진 고기국물이 어우러진 ‘섞곰탕’은 술에 혹사당한 속을 살살 어르고 달래준다. 적당한 기름기와 자극적이지 않은 국물이 해장에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꿩 육수를 더해서 만든 이 집의 평양냉면도 해장의 일등공신이다.
복매운탕 | 부평 | 참복집 | 이재훈(팔레 드 고몽, 뚜또베네 주방장)
인천 부평에 위치한 참복집은 연세 지긋한 사장님들이 운영하는 오래된 식당이다. 이 집 복매운탕은 양념이 진하지 않고 마치 지리를 마시는 것처럼 칼칼하게 맑은 느낌이 일품이다. 콩나물과 미나리를 듬뿍 넣어 시원한 맛이 두드러지면서 많이 맵지 않아 해장에 제격.
순댓국 | 부평 | 진천토종순대 | 장은실(‘라망’ 편집장)
‘진천토종순대’라는 상호가 흔하긴 하지만 원조 집이 부평 청천동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을 듯. 직접 빚은 선지가 가득한 피순대와 당면 순대가 적절한 비율로 섞여 들어간 위에 그릇 가득 넘치도록 각종 내장 부위까지 푸짐하다. 점도가 60% 이상은 되는 것 같이 걸쭉한 뻘건 국물과 함께 이들을 숟가락 하나 가득 퍼먹기 시작하면 일주일 전 마셨던 소주도 해장되는 기분이다.
가오리찜 | 속초 | 이모네식당 | 안상호(‘헤리티지 뮤인’ 피처 에디터)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과 오도독 씹히는 가오리가 제 맛이다. 무와 감자가 들어간 가오리찜은 빨갛고 걸쭉한 양념이 달짝지근하면서 맵다. 속부터 머리 끝까지, 심지어 귀까지 얼얼해지지만 그에 비례해 몸에 적체돼 있던 알코올도 흘러내린 땀과 함께 싹 사라진다. 그리고 외친다. “여기 공기밥 추가요.” 해장은 이내 식사로 이어진다. 이 집 생선모듬찜도 좋다.
게국지 | 안면도 | 솔밭가든 | 이지민(대동여주도(酒) 컨텐츠 제작자)
안면도에 갈 때면 항상 싱싱한 해산물에 시원하게 마시곤 하는데, 다음날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해장하러 가는 곳이 솔밭가든이다. 이곳에서는 배추, 늙은 호박과 꽃게, 대하에 냉장 숙성시킨 특제 다대기를 풀어 시원하게 끓여낸 게국지를 맛볼 수 있다. 개운하고 얼큰해서 해장용으로 최고. 남은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고 나면 온 몸에 땀이 솔솔, 술 기운이 빠져나가 개운하다.
콩나물국밥 | 전주 | 왱이집 | 김민지(푸드 스타일리스트)
전국적으로 유명한 왱이집 역시 전주 남부시장 스타일의 맑은 콩나물국밥을 선보인다. 전주는 갈 때마다 어김 없이 과음하게 되는 도시인데, 다음날 왱이집의 콩나물국밥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숙취가 어느새 말끔히 가셔있다.
열무김치 된장 물회 | 장흥 | 삭금회집 | 장민영(푸드 컨텐츠 기획 작가)
기본적으로 물회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다. 새콤달콤한 맛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아 되도록 피하는 편이지만 장흥 삭금회집의 물회만은 개운한 해장을 위해 예외다. 시원하게 잘 삭혀 콤콤한 향이 피어 오르는 열무김치에 된장으로 간을 맞춘 이 집 물회라면 언제나 환영! 회는 ‘새미’ 회가 들어가는데, 범치, 쑤기미, 쐬미 등으로 불리는 생선이다.
졸복탕 | 통영 | 만성복집 | 유경혜(‘수요미식회’ 작가)
통영 만성복집은 ‘수요미식회’ 통영&거제편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이 집 졸복탕은 너무 해장이 잘되어 또다시 술을 마시게 만드는 무서운(?) 해장 음식이다. 숙취로 인해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가시게 하는 향긋한 미나리향을 맡은 후에, 졸복에서 우러나온 시원하고 맑은 국물을 들이키면 쪼그라든 간이 바로 회복되는 느낌이 든다.
붕장어국찜 | 부산 | 죽도횟집 | 노중훈(여행 칼럼니스트)
부산 기장군 죽도횟집의 붕장어국찜은 원래 파는 메뉴는 아니고 식당을 운영하는 이 집의 가내 보양식이다. 말 그대로 국과 찜의 중간 형태인데, 해장과 보양이 한꺼번에 이뤄진다. 붕장어 대가리와 껍질, 된장, 대파, 양파, 고추, 파 뿌리 등을 넣고 3시간 이상 끓여 육수를 마련한다. 여기에 시래기, 고사리, 청각, 도라지, 따개비 등을 넣고 다시 끓여낸다. 쌀가루와 찹쌀가루가 들어가기 때문에 걸쭉하다.
복 지리 | 부산 | 청라복국 | 배순탁(‘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제 1회 부산 록페스티벌’에 갔다가 인생 최초로 복 지리를 먹어봤다. 지금껏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해장 경험이었다. 전날 과도한 음주로 배배 꼬여 있던 장이 실시간으로 ‘스윽’ 풀리는 느낌은 평생 처음이었다. 부산 록페스티벌이 출범한 것이 이미 17년 전인 2000년도의 일이지만 나는 여태도 여전히 최고의 숙취 해소 음식으로 복 지리를 꼽는다.
옥돔무국 | 제주 | 한라식당 | 박정배(푸드 칼럼니스트)
제주시청 앞 한라식당에서 옥돔무국을 한 번 맛보면 다른 해장국을 다 잊게 돼있다. 한라산 겨울 눈을 닮은 겨울 하얀 무는 사르르 녹고 도톰한 옥돔은 사각거리며 씹힌다. 소금만으로 맛을 내는데 별다른 재료도 넣지 않고도 그 맛이 나는 것은 워낙 좋은 재료를 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순수한 것들의 정수다.
보말칼국수 | 제주 | 옥돔식당 | 김작가(대중음악 평론가)
꼼꼼히 손질한 보말이 주는 해장력이란 마치 햇볕과 같아서 숙취가 부드럽게 벗겨나가며, 막힌 속은 단박에 뚫리곤 한다. 제주 모슬포에 있는 옥돔식당은 제주에 갈 때마다 만사 제치고 가는 집 중의 하나다. 진득한 국물에 잠긴 칼국수가 잘 어우러진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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