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진주만 메시지는 예상대로 사죄나 반성이 빠진 채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선 안된다”는 모호한 언급으로 끝났다. 태평양전쟁 도발 75년 만에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희생자를 애도했지만 전쟁책임은 거론하지 않아 미국과 일본만을 위한 화해이벤트에 그쳤다는 평가다. 이에 중국 등 주변국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꼼수 방문’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27일(현지시간) 호놀룰루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침몰한 미 군함 애리조나호 위에 세워진 애리조나기념관으로 이동해 미일 정상이 공동으로 헌화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올해 5월 오바마 대통령의 원폭지 히로시마 방문에 따른 답방형식으로, 2차 대전의 끝과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교차방문하며 서로 구원을 푼 것이다. 미국 비밀경호국(SS)의 호위를 받으며 보트를 타고 이동한 두 정상은 1941년 12월7일 옛 일본군의 공습으로 숨진 이들의 이름이 적힌 위문벽 앞에 다가가 나란히 묵념도 올렸다.
두 정상은 이어 진주만ㆍ히캄 합동기지로 이동해 방문소감은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 나라와 양국 국민간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며 “전쟁의 상처가 우애로 바뀔 수 있고 과거의 적이 동맹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부전(不戰)과 동맹을 강조했다. 그는 “전쟁의 참화는 두 번 다시 되풀이하면 안 된다”고 입을 뗀 뒤 “여기서 시작된 전쟁이 앗아간 모든 용사의 목숨, 전쟁의 희생이 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영혼에 애도의 정성을 바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이 있었다는 자체만 상기할뿐 일본군의 비열한 기습이나 반성은 입에 담지 않았다. ‘통절한 반성’ ‘깊은 회오’(悔梧ㆍ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음) 등의 표현조차 입밖에 내지 않았다. 오히려 “전후 70년간 평화국가로서의 행보에 우리 일본인들은 조용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자화자찬까지 했다.
이에 중국은 아베 총리를 향해 “진정어린 반성부터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28일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간 화해는 반드시 가해자의 성의있고 깊은 반성의 기초 위에서 이뤄진다”라며 “아시아 피해국 입장에서 일본이 아무리 많은 교묘한 쇼를 보여주더라도 한 번의 진심어린 반성보다 못하다”고 밝혔다.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도 이날 ‘하와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베는 마땅히 난징(南京)에 와야 한다’ 제목의 사설에서 "일본이 역사문제의 화해를 진정으로 추구한다면 진주만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을 찾아야 했다"고 촉구했다.
일본 내에서도 비판적 평가가 나오고 있다. 히로시마원폭피해단체 쓰보이 스나오(坪井直) 이사장은 “아시아국가들에도 똑같이 위령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고 사쿠마 구니히코(佐久間邦彦)씨는 “전쟁의 계기를 만든 점은 사죄했어야 미래지향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자민당 안팎에선 진주만 방문이 역대 어느 정권도 실천하지 못한 파격행보라며 의미를 강조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아베 총리가 진주만 희생자를 추모한 직후인 이날 오후 1시 주요 각료인 이마무라 마사히로(今村雅弘) 부흥상이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베의 사과없는 진주만 방문 이벤트는 일본 우파세력의 반발을 피해가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도 비등하다. 트럼프 정권 등장에 앞서 미일 동맹을 재확인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사죄하지 않았다’는 정치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두 정상의 미일동맹 재확인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시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불투명하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두 정상에겐 최고의 상징적 업적이지만 이런 접근법은 어느 때보다 더 큰 시험대에 오를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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