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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제자를 아들로 품은 남해초 감독

입력
2016.12.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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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강릉 소년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포즈를 취한 이은규(왼쪽)와 박진희 감독. 이은규는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박진희 감독 제공
지난 5월 강릉 소년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포즈를 취한 이은규(왼쪽)와 박진희 감독. 이은규는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박진희 감독 제공

박진희(37) 경남 남해초등학교 축구 감독은 작년 이맘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채아 양을 얻었다. 오는 29일이 첫 돌이다. 그러나 다음 달에는 아들 하나가 또 생긴다. 연년생 둘째가 아니라 채야 양 오빠다. 박 감독은 제자 이은규(12)를 아들로 입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박 감독은 은규를 유치원 때부터 봤다. 은규보다 두 살 위의 축구 선수인 형 세규도 남해초를 졸업한 박 감독의 제자다. 또래 중에서도 특히 날쌘 은규는 박 감독 눈을 사로잡았다.

세규-은규 형제는 가정 형편이 어렵다. 은규가 세 살 때 부모님이 헤어졌다. 아버지는 떠났고 타지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두 아들을 제대로 돌보기 힘들었다. 은규가 툭하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굶는 걸 본 박 감독은 4학년 때부터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박 감독의 부인도 은규를 아들처럼 알뜰살뜰 돌봤다. 박 감독은 “형인 세규는 침착한 편인데 은규는 고집도 세고 성격도 강해서 방치하면 삐뚤어질 것 같았다. 그 재능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은규는 박 감독 품 안에서 무럭무럭 성장했다. 6학년인 올해 전국 초등축구리그 경남서부 지역 득점 1위, 소년체전 최우수선수, 화랑대기 득점왕을 휩쓸었다. 남해초는 올해 전국대회 3관왕(춘계연맹전ㆍ소년체전ㆍ화랑대기)을 차지했다. 박 감독은 “은규는 양 발을 자유자재로 쓰고 위치 선정, 슈팅, 볼 키핑이 다 좋다. 한 마디로 타고 났다”고 했다. 현재 국가대표 중 이은규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로 박 감독은 권창훈(22ㆍ수원)을 꼽았다.

지난 12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2016 축구사랑나눔' 행사에서 초등부 우수선수로 선정된 남해초 이은규(가운데)와 박진희(오른쪽) 감독. 왼쪽은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대한축구협회 제공
지난 12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2016 축구사랑나눔' 행사에서 초등부 우수선수로 선정된 남해초 이은규(가운데)와 박진희(오른쪽) 감독. 왼쪽은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대한축구협회 제공

은규가 중학교 진학을 앞두자 박 감독은 제자를 아예 아들 삼기로 결심했다. 박 감독의 부인이 먼저 제안했다. 부부는 먼저 은규의 의향을 물었다. 은규도 처음에는 망설였다. 박 감독은 “은규는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이 경기장에 오는 걸 부러워했다. ‘네가 중학교 가면 내가 경기장 가서 봐 주겠다’고 하자 며칠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고 털어놨다. 은규의 친어머니 동의도 받았지만 입양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친아버지 동의가 필요한데 현재 연락이 잘 안 닿는다. 수소문 끝에 만나도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박 감독은 입양을 위한 과정을 꼼꼼히 밟고 있다. 이르면 다음 달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만에 하나 걸림돌이 생겨 입양이 힘들어지면 후견인으로라도 끝까지 돌볼 생각이다.

박진희 감독과 남해초등학교 선수들. 박 감독은 그라운드 안에서는 엄격한 지도자이지만 운동장을 벗어나면 선수들과 낚시, 영화를 함께 하며 형, 동생처럼 지낸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박진희 감독과 남해초등학교 선수들. 박 감독은 그라운드 안에서는 엄격한 지도자이지만 운동장을 벗어나면 선수들과 낚시, 영화를 함께 하며 형, 동생처럼 지낸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사실 박 감독은 은규 말고도 이미 아들이 여럿 있다. 남해초 선수들에게는 그가 ‘아버지’이자 ‘형’이다.

박 감독은 스물한 살 때인 2000년 선수를 그만뒀다. 일반 기업 취직을 준비하던 중 아는 선배가 병환으로 남해초 감독을 할 수 없게 돼 임시로 3개월만 맡기로 했다. 그 사이 아이들과 정이 들었고 정식 감독으로 눌러앉았다. 2001년부터 했으니 벌써 16년째다. 남해초는 경남 지역에서도 1승을 올리기 힘든 시골 학교였지만 박 감독 부임 뒤 전국의 쟁쟁한 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으로 성장했다. 2005년 지역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이듬해 소년체전 3위, 작년 저학년 전국대회 우승에 이어 올해 고학년 대회를 평정했다. 박 감독은 “나도 선수 때 소외감을 많이 느꼈다. 우리 시절에는 부모님이 학교를 자주 찾아야만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공평하게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했다”고 비결을 밝혔다. 운동장 안에서는 누구보다 엄격하게 선수들을 다그쳤지만 훈련이 끝나면 함께 낚시를 가고 영화도 보며 형제처럼 부대꼈다. 박 감독은 “지금도 큰 욕심은 없다.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뒤에서 조력하고 싶을 뿐”이라고 몸을 낮췄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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