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종종 먹던 단팥죽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었나 보다. 쫄깃한 새알이 동동 띄워져 있었다. 동짓날 엄마와 함께 조몰락조몰락 새알심을 만드는 재미가 끝나고, 막상 밍밍한 팥죽을 먹을 때는 숟가락의 움직임이 유난히 느려졌다. 동치미와 김치가 함께 나오는 팥죽 식사에 괜히 심통이 났고, ‘그냥 팥죽에 설탕 좀 풀어주지’ 했던 기억이 매년 동지면 떠오른다.
미국에서도 윈터 소스티스 (Winter Solstice), 그러니까 동지는 모두가 알고 모두에게 회자되는 날이다. 특히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 추운 겨울 뉴욕의 동지는 역설적으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기점’이라는 희망의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11월 말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 새해까지 이어지는 이곳 연말연시 분위기에 휩쓸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주중에 딱히 기념할 만한 행사나 음식이 없는 동지는 곧 뒷전이 되어버린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교포 친구는 집에서 팥죽을 꼭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먹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팥죽이 한국의 크리스마스 음식인 줄 알았다고도 했다.
올해 동짓날에는 모처럼 8년째 뉴욕 플러싱의 한인 봉사센터에서 동지 팥죽 봉사를 주도하는 김정광 미주한국불교문화원장을 도와 팥죽을 만드는 봉사에 동참하게 됐다. 김 회장은 전날부터 팥을 불리고 새벽에 새알심 반죽을 준비해 왔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한인 봉사센터 식당 한 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새알을 만들기 시작하자 곧 여기저기서 어르신들의 눈길이 쏟아진다. “오늘 팥죽 먹는 날인가?” “나도 어렸을 때 만들었는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도 있고, 옆에서 보시다 답답하셨는지 “그렇게 한 개씩 굴리면 어느 세월에 다하누?” 하시며 곧 팔을 걷어 붙이고 한번에 새알을 두 세 개씩 굴리는 신공을 보여주시는 분도 있다.
괜히 급한 마음에 어줍잖게 따라 하다가 손바닥에 굴리던 반죽이 한곳에 몰려 붙어버린다. 다시 떼서 하나씩 굴리느라 시간만 버렸다. 7명의 봉사자와 시작한 새알심 만들기의 참석자는 시간이 지나자 함께하신 어르신들까지 12명이 됐고 촉촉한 찹쌀반죽을 조금씩 떼서 만드는 새알심의 크기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그래도 봉사센터 주방 실장님 잔소리 덕에 얼추 비슷한 크기의, 500인분을 위한 새알심이 2시간 안에 만들어졌다.
식당에서 새알심을 굴리는 동안 주방에서는 팥물 내리기가 한창이다. 전날부터 불려 삶은 팥을 커다란 보에 싸고 눌러 팥 껍질을 분리해 내는 등 공도 힘도 많이 들어가는 작업은 주방 스태프와 건장한 봉사자의 몫으로 맡겨졌다.
곧 부드러운 팥물에 쌀을 넣은 커다란 솥 6개를 나란히 불에 올리고 봉사자들이 흡사 노를 젓듯 커다란 주걱으로 팥죽을 젓는다. 팥물과 쌀로 시작된 팥죽이 의외로 무거워 놀랐는데, 이 팥물이 걸쭉해지고 쌀이 익어 끓어오를 때까지 주걱으로 젓고 있자니 점점 더 무거워진다. 새알심은 따로 끓여 먹기 직전 팥죽에 넣어 휘휘 저어주니 동그란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다.
동치미와 김치를 곁들인 팥죽 배식을 끝내고 한 그릇 받아 먹으니 이제야 팥죽과 동치미의 궁합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부드러운 팥죽과 쫄깃한 새알심을 먹으며 예전에는 동지가 작은 설이라 불릴 만큼 큰 명절이었다는 이야기, 동지를 기점으로 기운이 바뀐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모처럼 한국의 명절 동지를 제대로 보낸 느낌이다. 올해는 미국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새해 중간에 따뜻하게 한자리 차지해 슴슴한 팥죽과 동치미와의 궁합, 그리고 더 많은 이들과 명절의 의미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특별한 동지였다.
반찬스토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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