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끝에서 편한 정치 해온 한국보수
비박계도 종북 몰이 구태 보인 적 있어
일시 생명연장 아닌 보수철학 구축해야
누진적 상속세 부과와 월가 투기세 신설,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노조활동 강화 등 버니 샌더스의 공약은 미국에 사회주의를 실험하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유럽 기준으로 보면 그가 중도파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유럽 기준을 적용하면 한국의 보수는 오른쪽으로 꽤나 치우친 보수가 될 수밖에 없다. 맨 끝에 위치한 보수가 오랫동안 보수의 주류로 행세한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기울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쪽은 불안하고 위태롭지만 다른 한쪽은 안정적이고 편하다. 한국의 자칭 보수는 안정적 자리를 독차지하면서 편하게 정치를 해 왔다. 그들의 주특기는 종북주의, 지역주의, 물신주의, 친미주의를 섞어 반대파를 공격하거나 유권자를 현혹하는 것이다. 보수언론, 보수학자 등 우군도 든든하다. 그러면 유권자가 표를 몰아주니 정치 철학이나 원칙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보수가 분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정우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신보수의 깃발로 보수정권 재창출을 이룩하겠다” 하고, 탈당파들은 “진정한 보수 정치의 중심을 세우겠다”고 하니 남는 세력이나 떠나려는 세력 모두 새로운 보수를 앞세운다.
보수란 보전하고 지킨다는 뜻인데 한국의 보수는 이제껏 무엇을 보전하고 지키겠다는 것인지 표나게 밝힌 적이 거의 없다. 원내대표 연설에서 공정한 시장경제와 복지확대 등을 강조하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1항을 환기한 유승민 의원이 거의 유일하다.
영국의 보수학자 로저 스크러튼은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에서 선대로부터 받은 물질적ㆍ정신적 유산을 지켜 후대에 물려주고, 약자를 보호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연대의식을 잊지 않으며, 스스로 세운 원칙을 어기지 않는 게 보수라고 했다. 이 말을 한국에 적용하면 대부분 맞지 않는다. 보수가 원칙조차 없고, 강자에게 힘을 몰아주며, 선대가 넘겨준 좋은 유산을 헌신짝 취급했다는 사실은 국정농단 사태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리의 보수 전통이 이토록 형편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중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개혁을 적극 추진했던 이가 적지 않으며 특히 국운이 백척간두에 놓인 조선 말에는 이회영, 이상룡처럼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고 낯선 이국 땅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고초를 겪은 이도 있다.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계훈제, 김수영, 리영희 등 독재에 맞선 인사들도 출발은 보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지적했듯 민족분단 상황에서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이들을 자칭 보수가 불온 인사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을 기만했는데도 그 품에 안주하며 촛불 정신을 우롱하는 친박계는 이미 국민 마음에서 지워졌으니 따로 관심을 보일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탈당파 김무성 의원이나 정문헌 전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며 종북몰이를 했다가 거짓으로 들통난 데서 알 수 있듯 새로 거듭나겠다는 탈당파의 다짐 또한 그대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들이 남북갈등 구도를 표 얻는 방편으로 삼고 시장근본주의와 북한붕괴론 같은 수명 다한 이론을 계속 붙잡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보수에 관대한 풍토에 젖어 부지불식간에 부패한 얼굴을 내보일수도 있다.
그런데도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탈당파의 지지율이 18.7%로 2위에 오른 데서 알 수 있듯 한국은 여전히 보수에 우호적이다. 새로운 보수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결과라고는 해도 비박계 역시 국정농단에 책임이 있는 점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후하다. 진보 세력에게 그렇게까지 매정했던 것을 떠올리면 지나치게 불공평하기도 하다.
친박계와 결별한다는 이유만으로 보내는 지지는 탈당파의 쇄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그러면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기대한 보수의 일대 혁신도 멀어진다. 그러니 새로운 보수의 다짐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일시적 생명 연장이 아니라 보수의 재탄생에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종북몰이 같은 구시대 방법이 아니라 비전과 정책을 놓고 진보와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야 한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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