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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끄러움은 왜 우리 몫인가

입력
2016.12.2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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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의 초기작 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단편이 있다. 주인공은 두 번 이혼하고 다시 결혼한 중년 여성이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이 서울 토박이의 어린 시절은 홀어머니에 동생이 여럿이어서 가진 것의 전부인 집 한 채를 세 놓아 근근이 먹고 사는 형편이었다. 6ㆍ25가 나고 남쪽으로 피난 간 곳에 미군 기지가 들어선다. 늘 배가 고팠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맏이던 그에게 미군 상대 유흥업소 출입을 강요한다.

“무서워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던 주인공은 그 일로 자신의 내부에 있던 “부끄러움을 타는 여린 감수성”에 “영영 두터운 딱지”를 붙이고 말았음을 느낀다. “제 딸을 양갈보짓 시키지 못해 눈이 뒤집힌 여자를 어머니로 가진 여자, 그 가슴의 그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이유였다.

그가 어릴 적 봉인했던 ‘부끄러움’을 중년에 문득 되살린 것은 서울에 온 일본인 단체관광객을 이끄는 한국인 가이드가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라고 일본말 하는 것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작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잊고 지내지 않았느냐는 일깨움에 공명한 때문인지 이 작품은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험문제로 출제되는 인기를 누렸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동양 고전에서 중요한 덕목이었다. ‘맹자’는 ‘부끄러움의 장(恥之章)’에서 “부끄러움은 내가 하늘에서 받은 본연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그 마음을 간직하고 따르면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지만 반대로 잃고 따르지 않으면 금수 같은 존재가 된다”고 했다. 관중의 업적을 담은 중국 고전 ‘관자(管子)’에서는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으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꼽았다. 또 조선후기 학자 이만부는 문집에 담은 ‘부끄러움을 닦는 법’이라는 글에서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며 “이를 일러 부끄러움을 닦는다고 한다”고 했다.

연말이면 자연히 지난 한 해 내게 부끄러웠던 일이 무엇일까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올해는 자신의 부끄러웠던 일을 되새기며 반성하기에 앞서 다들 남이 저지른 일로 부끄러워 몸살을 앓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해외동포들은 고국의 일부 정치권력이 저지른 부정과 일탈에 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느냐고 한탄했다. 대학 총장과 몇몇 교수들의 비행을 고발하고 시정을 요구한 대학생들이 손에 든 피켓에도 ‘왜 부끄러움은 우리 몫이냐’는 글귀가 있었다. 정권 입맛에 맞게 기사가 난도질 되는 걸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한 기자들의 최근 성명서 제목도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인가? 공정언론ㆍ공정인사를 회복하라’였다.

위ㆍ아래를 막론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니 부끄러움을 알 리도 없는 사람들이 주위에 수두룩하다. 다가오는 새해에 바람이 있다면, 그 모든 부끄러움이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의 몫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로 타인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남의 부끄러운 짓 때문에 부끄러워해야 하는 딱한 수준을 이제 그만 넘어서서 나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돌아볼 작은 여유를 갖게 되길 바란다. 박완서 소설의 주인공은 잊고 지냈던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되찾은 순간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올랐다고 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 그런 “환희”를 누릴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김범수 문화부장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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