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수면위로 드러나기 몇 달 전 한 여권인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내년 1월1일자 신문 1면에 무슨 내용이 실릴 것 같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무엇이냐”는 박 대통령의 되물음에 그는 “1면 오른쪽에는 2017년을 밝히는 일출사진이 실릴 것이고 톱기사는 차기 대통령 물망에 오른 후보들의 지지도 여론조사결과가 차지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는 박 대통령이 20대 총선에서 예상을 뒤집고 여당이 참패한 상태에서도 1년 이상 남은 임기를 레임덕 없이 보내기 위해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시기였다. 이 대화를 통해 그는 박 대통령이 그나마 제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은 사실상 올해까지임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이다. 국정의 관심이 차기 대선에 쏠리는 만큼 박 대통령의 입지가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수정하는 등 국정 개입에 깊숙이 간여했던 정황을 보여준 태블릿PC의 존재가 보도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박 대통령의 잇따른 거짓 해명에 국민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고, 적지 않은 친박 의원조차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지며 등을 돌렸다. 그토록 집착했던 정국 운영 주도권은커녕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모든 운명을 걸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결국 이 인사의 1면 기사 예측은 모두 빗나간 셈이다. 차기 대선 레이스는 수개월 앞당겨져 이미 숨가쁘게 진행중이다. 새해 첫날에 일출사진을 쓴다는 게 새로운 한 해를 여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미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탄핵정국 돌입으로 예측 불가능한 현실에 어울릴 지 의문이다.
탄핵정국하의 대한민국호는 곳곳에서 선장 부재로 인한 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사드 배치, 영남권 신공항 선정 등을 둘러싼 추가 조치가 없어 지역갈등만 부추겼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콘트롤타워 없는 작금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참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선장 부재 장기화가 초래할 대외 환경은 더더욱 위태롭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핵전력 강화 발언으로 북한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6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일본 히로시마 원폭피해지 방문의 답방 성격으로 이뤄지는 아베 총리의 행보인 터라 미일 양국 외교사의 획을 그을 만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 과거사를 둘러싼 명쾌한 정리가 이뤄지지 않은 우리로서는 아베의 진주만 방문이 그다지 달가울 리 없지만, 그보다는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직접 논평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 사태가 터진 이후 3차례 담화를 통해 사죄했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퇴진 문제를 국회로 넘겨 정치 갈등을 부추겼고,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탄핵소추 과정에 법적인 하자가 있음을 강조하며 스스로 하야할 뜻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은 매주 주말 9차례에 걸쳐 진행된 촛불집회를 통해 국민들이 이야기하려는 뜻을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외부와 담을 쌓고 소통을 외면한 채 스스로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대한민국호를 위기에 빠뜨려놓고도 위기임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데 대한 일깨움임을 말이다.
꽉 막힌 대한민국호의 혈전을 뚫어줄 방법은 헌재의 탄핵 판결이 나기 전에 박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의 하야 일정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미 국민신뢰를 잃은 마당에 헌재의 판결에 기대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은 무리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언급한 ‘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제는 한번 믿어보고 싶다.
한창만 전국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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