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2.21
1962년 8월호 ‘사상계’에 소설가 김동리와 일본 작가 히라바야시 다이코(1905~1972)의 대담 ‘한일 문학을 말한다’가 실렸는데, 거기에 “평소 순문학 작가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히라바야시가 자국의 유행작가(대중 작가)를 대놓고 폄훼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글쎄요. 그런 작가는 사고라는 게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쓰고 있는데 몇 명의 비서를 채용해서 자료를 모아오게 해 가지고는 그 자료를 가지고 쓸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같은 작가는 상당히 반미(反美)인데요. 그 이유가 자기 비서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어요.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료를 모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쓰모토라고 하면 인간이 아니라 ‘타이프라이터’입니다.” 히라바야시는 보수적인 반공작가라 한다.(‘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조영일 해설 참조.)
마쓰모토 세이초(1909~1992)는 52년 ‘어느 고쿠라 일기전’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55년 ‘잠복’을 시작으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해, ‘점과 선’ ‘눈의 벽’ 등 베스트셀러를 무서운 속도로 쏟아내며 이른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장르를 개척했다. 세이초는 사회구조적 억압과 불의, 소시민의 경제ㆍ문화적 욕망이 부딪치는 양상을 구체적인 상황과 인물들의 심리를 통해 들여다보는 작품을 주로 썼고, 그것이 당대 독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그는 일본공산당에 내내 우호적이었고, 베트남전쟁 반전 성명에도 앞장선 평화주의자였다. 위에 등장한 입 거친 작가의 감정 섞인 평의 근거가 그거였고, 그가 단숨에 일본의 인기 작가로 부상한 것도 그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이초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15세에 한 회사의 출장소 급사로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고, 인쇄소 견습공- 신문사 촉탁사원- 정식 사원으로 살다가 43세에야 등단했다. 늦은 만큼 쌓인 게 많았던지 그는 92년 세상을 뜰 때까지 약 40년간 약 750권(편저 포함)의 책을 냈다고 한다. 장편소설만 약 100편을 썼고, 그의 기량이 가장 빛났던 중ㆍ단편도 350여 편을 남겼다. 논픽션과 평론, 역사 관련 저서도 적지 않았다.
한국서는 “그런 작가는 사고라는 게 없다”는 히라바야시의 ‘평가’를 평가하는 작업이 근년에야, 독자들이 앞장서 시작한 듯하다. 1909년 12월 21일은 세이초의 호적에 기록된 생일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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