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2.20

안익태(1906~1965).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40년 오늘 그의 곡을 애국가의 곡으로 공식 채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12월 20일 안익태의 곡을 ‘애국가’의 곡으로 채택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충칭으로 청사를 옮긴 임시정부는 앞서 광복군 창설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공식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작사가는 공식적으로는 ‘미상(未詳)’이지만 윤치호가 썼다는 설이 지배적이고,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 목사 최병헌과 함께 지었다거나 대성학교를 함께 운영하던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설이 이런저런 문헌에 소개돼 있다. 스코틀랜드 가곡 ‘올드랭사인’의 곡으로 불리던 애국가는 당시 미국서 활동 중이던 작곡가 겸 지휘자 안익태가 곡을 붙였고, 이듬해 10월 유학생 잡지 ‘The Korean Student Bulletin’에 애국가 악보를 소개했다.

애국가에 대한 논란은 임정 시절부터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주된 논란은 작사ㆍ작곡가의 친일 행적.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주필을 지냈지만, 1910년대부터 이미 적극적인 친일파로 돌아서 귀족 작위까지 받은 인물. 안익태의 친일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그는 15세에 일본으로 유학 가 음악(첼로)을 전공하고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ㆍ커티스 음악학교와 펜실베이니아의 주립 템플대 음악대학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했다. 애국가 작곡 당시 그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는 36년 유럽으로 진출해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의 여러 교향악단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는데, 그의 친일 사례로 거론되는 건 주로 유럽 활동기다.

그는 ‘일본-독일협회’와 관계를 맺었고, 만주국 축전 음악회에서 지휘했다. 당시 그는 일본국 여권을 지닌 재외일본 국민이었고, 2차 대전 발발 이후에는 추축국 출신 음악가로서 활동해야 했을 것이다. 애국ㆍ애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삶은, 여러 해외 독립운동가의 삶에 견주어 썩 모범적이지 않고, 후세의 기준에서는 더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가 식민지 조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건 그는 음악가였다. 비록 말도 탈도 많지만, 그 시절 자진해서 애국가를 작곡했다. 그는 44년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으로 이주해 귀화했고, 46년 현지 여성과 결혼했다.

현행 대통령령 국민의례규정에는 애국가 제창 항목이 있지만, 관행을 따르는 것일 뿐 국가(國歌)의 법적 근거는 없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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