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지난달 22일 신형 그랜저(IG) 출시 행사에서 1시간여 동안 그랜저의 매끈하면서도 웅장한 외관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신형 그랜저는 현대ㆍ기아차의 디자인을 진두지휘하는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 총괄 사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한 첫 작품이다. 자동차 디자인계의 거장 피터 슈라이어의 노력에 보답하듯 그랜저는 출시 3주일 만에 누적 계약 4만대를 돌파하며 준대형 세단 시장 최강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슈퍼스타급 디자이너들의 활약
디자인은 완성차 업체의 한해 농사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차의 기본기가 상향 평준화하면서 경쟁차들과의 차별화를 가능하게 하는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소비자들이 ‘스파이샷’(신차 공개 전 찍힌 사진) 한 장에 열광할 정도로 디자인은 가장 강렬하게 브랜드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독보적인 디자인을 내놓는 자동차 디자이너는 천만금을 주고라도 데려올 만큼 가치를 인정받으며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른다.
유능한 디자이너는 한 브랜드의 운명까지도 좌우한다. 14세 때부터 영국의 자존심 재규어에 자신의 자동차 디자인 습작을 보내 답변을 받을 정도로 재규어를 사랑한 이안 칼럼이 대표적이다.
1999년 재규어에 입사한 이안 칼럼은 현재 재규어 디자인 총괄을 맡고 있다. 그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재규어 카 디자인 어워드 2016'에 참석해 “60년대 재규어는 운동선수와 록스타 등이 타는 ‘쿨한 차’였지만 99년에는 할아버지들이 타는 차와 같았다”고 말했다.
이안 칼럼은 재규어를 할아버지가 아닌 젊은 여성들도 좋아하는 차로 바꾸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재규어의 전설적인 모델 ‘E-타입’을 계승한 ‘F-타입’ 컨버터블과 쿠페를 출시했고, 스포츠 세단 ‘XE’, 브랜드 역사상 최초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F-페이스’를 통해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의 차로 재규어를 재정의했다.
피터 슈라이어의 활약도 돋보였다. 기아차는 ‘디자인 경영’이 화두였던 2006년 크리스 뱅글, 이안 칼럼과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던 피터 슈라이어를 부사장으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아우디와 폭스바겐 디자인 총괄책임자를 역임한 그를 데려오기 위해 직접 독일로 날아가 삼고초려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2009년 피터 슈라이어 주도로 탄생한 준대형 세단 ‘K7’을 필두로 한 K시리즈는 최근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누적 판매량 464만대를 기록하며 기아차의 실적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디자이너 한 명이 가진 힘을 실감한 현대차그룹은 최근 슈퍼카 디자인으로 유명한 루크 동커볼케,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 범블비의 모델 GM 카마로를 디자인한 이상엽 상무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잇따라 영입해 ‘디자이너 드림팀’을 구축했다.
최근엔 람보르기니와 부가티 디자인으로 유명한 스포츠카 디자이너 알렉산더 셀리파노브도 유럽디자인센터 제네시스 담당으로 영입했다.
자동차의 운명을 결정하는 디자인
BMW에 감성적인 요소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2001년 4세대 BMW 7시리즈를 출시하며 직선 위주의 이전 모델과는 달리 전조등, 범퍼 등을 유려하게 잇는 디자인을 선보였지만 초기 평가는 썩 좋지 않았다. 후면 트렁크 부분의 형태가 치켜 올라간 엉덩이를 연상시킨다는 조롱이 나왔고, 심지어 BMW 마니아들로부터 “퇴진하라”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7시리즈는 BMW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호평 속에 오히려 인기를 구가했다.
1990년대 쌍용자동차가 내놓은 ‘무쏘’와 ‘뉴 코란도’는 SUV로서의 성능은 물론 지금 차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디자인을 자랑했다. 이 두 차를 앞세워 쌍용차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순차적으로 출시한 ‘로디우스’, ‘카이런’, ‘액티언’ 삼총사의 디자인에는 혹평이 쏟아졌다. 중국 상하이자동차의 쌍용차 인수와도 맞물려 중국차란 오해까지 받으며 삼총사의 인기는 더욱 하락했다. 상하이자동차의 먹튀 논란, 사측의 구조조정, 2009년 노조가 77일간 공장을 점거한 ‘쌍용차 사태’ 등이 이 못생긴 삼총사의 참담한 실패에서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뼈아픈 대가를 치른 쌍용차는 달라졌다. 디자인에 공을 들인 ‘티볼리’는 가격 대비 뛰어난 성능에 질리지 않는 외모를 무기로 지난해 초 출시 이후 빠르게 소형 SUV 시장을 평정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형태 자체가 예쁘기 어려운 왜건이 안 팔리는 것만 봐도 국내 소비자들은 차의 디자인에 특히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살아남기 위해선 신차 개발 초기부터 성능이나 안전성 이상으로 디자인에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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