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좌파진영이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비롯된 경제침체와 반(反) 세계화 정서가 유럽을 휩쓸며 포퓰리즘과 극우 정당이 득세하자 기존 정통 좌파정당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유럽의 일부 좌파정당들은 우파의 정책을 수용하는 우클릭 노선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21세기에 맞는 좌파진영 나름의 가치와 맞춤 별 정책을 대중들에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향후 유럽 내 좌파정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몰락하는 프랑스 좌파진영
프랑스에서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좌파인 집권 사회당이 정치적 변두리로 쫓겨났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지지율이 4%까지 곤두박질치자 이달 1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론조사 결과만 보면 내년 프랑스 대선은 이례적으로 우파인 공화당과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N) 간의 양자대결로 굳어질 전망이다. 올랑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할 때만 해도 좌파진영의 분위기는 지금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사회당은 2010년 5월 정책공약에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우파 자유주의’의 산물로 규정하고 부유세를 무려 75%까지 상향하는 조세개혁을 통한 양극화 해소 정책을 내걸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문제는 좌파 집권 이후로, 실업률은 계속 치솟았고 연이은 테러 등에 따른 반(反) 이민정서까지 거세졌다. 부실한 좌파정권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 국민들은 사회당의 반 자본주의 강령과 ‘부자 증세’ 정책 대신 극우정당의 반 이민정책에 더욱 많은 지지를 보내며 등을 돌렸다.
위기에 빠진 프랑스 좌파진영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올랑드 정부에서 경제장관을 역임한 에마뉘엘 마크롱은 올 4월 좌ㆍ우파를 아우르는 정치운동인 ‘앙 마르슈’(en marcheㆍ전진)를 출범시켰다. 더 이상 좌파로는 프랑스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여기고 우파 정책을 일부 수용하는 행보를 택한 것이다. 실제 마크롱은 사회당의 대표적 노동정책인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46시간까지 연장하는 법안을 추진하다 올 6월 노동자들로부터 달걀 세례를 받기도 했다. 마크롱은 내년 프랑스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예정이다. 사회당도 변화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있다. 올랑드의 불출마로 사회당의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른 마누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최근 친(親) 기업적 발언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킨 무슬림 여성의 부르키니(수영복) 착용 논란에 “프랑스 사회에 대한 도발”이라고 표현하는 등 프랑스 좌파의 전통적 행보에서 벗어나 우파에 한걸음 다가섰다.
다른 유럽 좌파진영도 벼랑 끝
프랑스 좌파진영의 상황은 유럽을 이끄는 주요국인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도 비슷하다. 영국에서는 올 6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ㆍEU 탈퇴)가 결정되면서 유럽을 휩쓰는 반 이민정서의 직격탄을 맞았다. 영국의 EU 잔류를 당론으로 내걸었던 좌파 노동당은 이달 8일 여론조사에서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인 25%를 기록했다. 집권 보수당(42%)에 17%포인트나 뒤지는 결과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노동당이 향후 집권을 위해서는 친 기업적 노선 등을 통해 중도로 한걸음 다가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블레어 전 총리는 1997년 총선에서 당시 노동당을 이끌며 국유화, 소득분배 같은 전통 좌파의 공약을 버리고 우파의 가치관을 내세우는 이른바 ‘제3의 길’을 통해 18년간 지속됐던 보수당의 집권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다.
하지만 올해 9월 영국 노동당 대표로 당내 소수 강경좌파로 꼽히는 제러미 코빈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노동당은 2020년 총선에서도 패배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오고 있다. 코빈은 우경화한 블레어 전 총리가 집권하던 시절 노동당의 모든 정책을 반대했고, 지금도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기업에 대한 보조금 삭감, 대학 수업료 면제 등 전통적 좌파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SP)이 2005년 총선을 기점으로 중도우파인 기독민주당(CDU)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연패한 데 이어 내년 9월 총선에서도 패배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사민당은 2000년대 한때 지지율이 40%대를 기록했으나 최근은 20%대로 반 토막 났다. 이민자 차별정책을 앞세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득세하며 지지율을 잠식한 결과다.
이탈리아에서도 중도좌파인 민주당의 마테오 렌치 총리가 추진했던 개헌안이 부결되면서 렌치 총리가 최근 사임했다. 내년 상반기에 치러질 이탈리아 조기총선에서 우파 정당들의 부상이 점쳐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에서 좌파정당이 몰락한 가장 큰 이유로 “경제위기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WSJ는 “유럽 좌파세력들이 경제정책에서 우파와 구분되는 뚜렷한 노선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가부채 감축정책에만 매몰됐다”며 “이는 노동자와 중산층 등 좌파 정당 핵심 지지자들에게 실망만 줬다”고 지적했다.
유럽 좌파세력의 마지막 불씨는
다만 유럽국가들에서 좌파진영을 지지하는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이달 11일 열린 루마니아 총선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PSD)가 승리를 거뒀다. 유럽에 부는 극우 민족주의의 거센 바람에도 루마니아 국민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보건 투자 확대 등을 내세운 사회민주당의 손을 들어줬다. 물론 일각에서는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이민문제가 부각되지 않아 극우파가 득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스페인과 그리스 등 남유럽에서는 극좌정당들이 중도좌파 정당들을 밀어내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스페인의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난과 긴축정책 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극좌정당인 포데모스가 제3정당으로 부상했다. 그리스의 경우에도 극좌정당인 시리자당이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총 300석중 145석을 차지하며 제1당으로 올라섰다. 허핑턴포스트는 “기득권 타파와 반 세계화라는 공통분모 속에 유럽 좌파진영에 대한 반감이 국가별로 극좌 또는 우경화로 분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유럽 좌파진영이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가치와 해법을 내놓지 못한다면 좌파정당들의 멸종도 상식 밖의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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