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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글쟁이 페달] 트럼프와 로드 바이크, 그 기묘한 만남

입력
2016.12.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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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만남까지는 아니지만 이상하고 어색한 만남들이 있다. “이건 정말 아니야!” 싶다기보다 “아아, 꼭 그래야 했을까…” 싶은 만남. 오늘은 그런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와 사이클의 만남이다.

2016년 올해 우리는 충격과 경악 속에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탄생을 지켜보게 되었지만, 1989년 세계 사이클 팬들은 ‘투르 드 트럼프(Tour de Trump)’라는 괴이한 로드 바이크 대회의 탄생을 벼락처럼 경험하게 된다.

한번 상상해보자. ‘트럼프 미인 대회’, ‘트럼프 포커 대회’, ‘트럼프 프로 레슬링 대회’는 그럴싸한 조합이다. 트럼프가 저런 대회를 주최하거나 주관한다 해도 사람들은 하나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 자전거 대회라니? 로드 바이크 레이스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칼로리 소모에 비해 선수의 평균 수입은 바닥을 헤매는 가난하고 처절한 스포츠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 조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투르 드 트럼프의 화려한 개막.
투르 드 트럼프의 화려한 개막.

분명한 건 투르 드 트럼프라는 대회가, 그것도 굉장히 큰 규모로 열렸다는 사실이다. 젊은 트럼프는 “‘투르 드 프랑스’의 아성에 도전하노라” 큰 소리를 뻥뻥 내지르며 바람을 잡았고, 신생 대회임에도 실제로 전 세계의 유명 프로 사이클리스트와 팀이 제법 참가했다. 비슷한 시기 열린 ‘투르 드 스페인’을 포기하고 참가한 팀도 있었을 정도다. 뭣보다 상금이 투르 드 프랑스 총상금의 4분의 1 수준으로 제법 짭짤했다. 투르 드 프랑스가 3주가 넘는 기간 동안 3,500㎞가 넘는 거리를 완주해야 하는 장기 레이스인 걸 감안하면, 중거리 투어(1,347㎞, 10 스테이지)인 투르 드 트럼프의 상금 규모는 당시로선 결코 작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돈이 많아 유명해지고, 나중에는 유명해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1980년대부터 그랬다. 그는 로드 바이크에 대해선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트럼프를 자전거와 연결시킨 인물은 따로 있었다. 농구해설가이자 사업가였던 빌리 패커다. 유럽 유명 대회에 필적할 미국 사이클 대회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리고, 대회 이름에 트럼프를 넣자고 부추기고, 실제로 성사시킨 실세가 바로 이 최순… 아니 빌리 패커라는 사람이었다. 놀라운 건 이 사람도 농구 전문가일 뿐 로드 바이크에 대해선 하나도 몰랐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실무자’도 ‘바지사장’도 자전거 따위엔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이었다.

1회 투르 드 트럼프에 참가한 미국의 사이클 영웅 그렉 르몽드.
1회 투르 드 트럼프에 참가한 미국의 사이클 영웅 그렉 르몽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첫 번째 배경은 그렉 르몽드라는 스타의 존재다. 르몽드는 1986년에 유럽인의 잔치였던 투르 드 프랑스에서 비유럽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일약 미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사이클 변방이던 미국에서 그렇게 사이클의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미국은 세계 로드 바이크 산업의 중심으로 성큼 다가서게 된다.

두 번째 배경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다. 이 나라의 실용주의는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돈이 된다면, 그리고 법이 허용한다면 무슨 짓이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확연히 많다. 비즈니스가 된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뛰어든다. 좋게 말해 체면이나 전통에 구애되지 않고 발상이 유연하다. 빌리 패커와 도널드 트럼프 역시 자전거에 대한 열정이 아닌 모종의 열정으로 투르 드 트럼프를 현실화시켰다. 다들 즐거워할 것 같으니 한번 해볼까, 하는 유희 감각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뭣보다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곳에 숟가락 얹지 않곤 못 배기는 트럼프의 기질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선수들과 함께 선 도널드 트럼프
선수들과 함께 선 도널드 트럼프

제1회 투르 드 트럼프 대회를 기록한 글이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왜 트럼프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납득되어버리는 느낌이다. 대회장엔 펜스엔 온갖 유명 기업의 광고판들이 어지러이 붙어 있다. 선수들 중엔 전설적인 선수 그렉 르몽드가 있는가 하면 네덜란드 최대의 성매매업소인 사우나 다이애나(Sauna Diana)를 스폰서로 둔 사이클 팀이 당당히 자리한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는 투르 드 트럼프를 자꾸만 “투어 데이 트럼프 (Tour Day Trump)”로 발음하고 있다. 관객들 한편에는 트럼프의 안티팬들이 ‘탐욕스런 트럼프’, ‘트럼프는 파리대왕’ 같은 문구를 쓴 피켓을 들고 야유를 보내는 중이다. 트럼프의 변호인단은 투르 드 트럼프 이전부터 콜로라도에서 열리고 있던 지역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럼프(Tour de Rump)’ 주최자에게, ‘상표권 위반으로 고소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편지를 보낸다(참고로 불과 2년 만에 끝장난 ‘투르 드 트럼프’에 반해, ‘투르 드 럼프’는 아직도 꾸준히 열리고 있는 지역 사이클 대회다).

1989년 5월 22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는 1회 대회의 흥행에 한껏 고무된 도널드 트럼프의 감탄사, “이건 괴물이 되어버렸지요!”(This thing has turned into a monster!)를 인용하며 “정말 그 말대로”라고 동의하며 끝맺는다. 2016년에 다시 보니 그 말은 정정되어야 할 것 같다. 괴물이 된 건 ‘투르 드 트럼프’가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자신이다. 그리고 미국인을 포함한 우리 지구인은 그 괴물과 함께 할 4년의 ‘투어(tour)’를 앞두고 있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참고자료(누르면 해당 기사의 원문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1989년 5월 22일 일러스트 레이티드 기사 'THE WHEELS OF FORTUNE'

-2016년 7월 1일 사이클링팁스 기사 'The art of the wheel: Remembering Donald Trump’s unconventional foray into American cycling'

-2016년 4월 10일 폴리티코 매거진 기사 'The Strange Tale of Donald Trump’s 1989 Biking Extravaga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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