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애슈턴 애플화이트 지음ㆍ이은진 옮김
시공사 발행ㆍ404쪽ㆍ1만8,000원
2016년을 감히 페미니즘 귀환의 원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지난 5월 강남역 살인 사건이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으로 페미니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이후 크고 작은 페미니즘 이슈들이 불거졌다.
“페미니즘은 생존의 문제”라는 이들에게 혹자는 ‘프로불편러’라 이름 붙인다. ‘뭘 이런 (당신만 눈 감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것을 가지고 불편하다고 하냐’는 조롱이자 타박인 셈이다. 그러나 ‘모두가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 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불편하다 말하는 누군가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페미니즘 역시 앞으로 더 영향력을 확대해 갈 것이다. 피해자가 분명한 만큼 ‘부당하고 불합리하다’는 목소리를 내야 하는 주체도 분명하다. 블랙파워운동은 ‘검은 것은 아름답다’를 슬로건으로 걸었고, 여성운동은 헬렌 레디의 노래 ‘나는 여자다’를 성가로 삼았다.
그런데 연령차별은 다르다. 나이는 누구나 먹기에 연령차별은 무섭도록 모두에게 열려 있다. 너무나도 만연하나 누구도 원인 규명의 노력과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역설은 나이가 보편조건이라는 데서 생겨난다. 더 끔찍한 것은 다른 차별이 대개 타인에 대한 혐오로 끝나는 데 반해 연령차별은 결국 자기혐오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며 뉴욕타임스, 플레이보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해 온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어느 날 문득 ‘노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왜 이렇게 암울할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사회는 ‘동안이시네요’라는 말을 의심할 여지 없는 칭찬으로 해석해왔고,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제 나이를 부정하며 나이 먹고 있었다.
연령차별을 뜻하는 ‘에이지즘(Ageism)’은 1969년 노인의학 전문의 로버트 버틀러가 만들었고 이미 사전에도 올랐다. “노인, 노년, 그리고 나이 드는 것 자체에 대한 편견에 찬 태도들의 조합”으로 정의된 이 단어는 빠르게 퍼져 나갔지만 격렬한 반응과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애슈턴은 신간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에서 “이제 래디컬 에이징을 시작할 때”라며 교묘하면서도 끈질기게 존재해온 연령차별을 파헤친다. 블로그에 마련한 코너 ‘저기, 이것도 연령차별인가요?’에 올라온 경험담과 각종 연구를 바탕으로 왜 연령차별 논의가 필요한지부터 구체적 실태, 대응 방안까지 소개했다.
저자는 심지어 의료 분야에서도 노인은 차별 받는다고 주장한다. 나이 많은 환자들이 통증을 호소할 때 많은 의사들이 이를 ‘치료 가능한 증상’으로 보는 대신 ‘그 나이라면 으레 있을 수 있는 일’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 경우 노인이 젊은 사람보다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낮을 수 밖에 없다.
여전히 ‘금기(禁忌)’에 가까운 ‘노인의 성(性)’을 건드리는 데도 거침 없다. 아직 ‘노인’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많은 이들이 노인을 “섹스에 관심이 없고, 건강 때문에 섹스를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섹스 상대를 찾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들어 그는 “성생활의 영역보다 연령차별이 공격적인 곳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이에 따라 형태가 변할 뿐 성생활 자체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에 동감하듯 1978년 어느 일요일 시인 메이 사턴은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우리 대다수는, 아직도 사랑이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사랑에 대해 뭘 알까? 그들은 성적 격정과 사랑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 (…)젊은 시절 못지않게 노년에도 사랑은 강렬할 것이다. 이전과 다르고 더 넓은 원 모양으로 시작되고 더 소중할 뿐이다.’ 사턴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노년을 즐겼다.
연령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저자는 간단하고 명확한 실천 지침을 내놓는다. “나이는 상대적”임을 인정하라. 나이가 하나의 연속체라는 점을 깨닫고, ‘노소(老少)’를 나누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게 그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저자가 “나이와의 화해”라고 표현하는 “나이 수용” 태도다.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사실대로 말하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나의 나이를 들었을 때 그에게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를 물으라는 구체적 지침도 내린다. 이어 저자는 “에이지 프라이드(Age pride)”를 강조한다.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거다.
책에는 수긍 가는 부분이 많지만 간혹 불편한 주장에 마주치기도 하는데, 어쨌든 분명한 것은 누구나, 공평하게, 나이 먹어가는 우리에게 애슈턴의 외침이 유효하다는 점이다. 역사는 ‘프로불편러’들에 의해 진보해왔다. 마지막 단락에서 애슈턴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억압에 맞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면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간다. 에이지 프라이드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