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근무자 계약해지 발표에
3200명 서명받아 고용안정 촉구
“돈을 절약한다는 핑계로 기본적인 노동권마저 무시하는 서울대가 부끄럽습니다.”
학기말 고사를 앞두고 시험 공부에 한창이어야 할 대학생들이 도서관이 아닌 거리로 나섰다. ‘빗소리’라는 이름으로 모인 서울대 학생 20여명은 열흘 동안 학내 구성원 3,27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14일 학교 측에 “비학생조교의 고용안정 방안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전달했다. 학생들은 ‘투쟁’이라는 글자가 적힌 빨간색 조끼를 입고 지나가는 계약직 노동자에게도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모두가 한 식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빗소리 소속 명재현(22)씨는 15일 “서울대라는 공동체가 잘 굴러가는 줄 알았는데 불합리한 문제가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빗소리는 “비정규직의 소리를 전한다”는 의미다. 올해 1월 서울대 셔틀버스 하청업체 소속 한 기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학생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됐다.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학생들이 온라인에서 연락처를 나누고 비정규직 문제를 공론화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임정원(23)씨는 “어느 날 나이 지긋한 청소노동자가 도서관 여자화장실 구석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학교를 가꾸기 위해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에게 내 줄 공간이 화장실밖에 없었는지 묻고 싶었다”고 했다.
빗소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 계정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한 인터뷰를 게재해 관심을 불러 모았다. 학기에 한 번씩 학생들이 직접 노동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빗소리의 목소리에 공감했고 12명으로 시작된 모임 규모는 두 배로 커졌다.
학생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부대끼며 대학의 주인은 교수와 학생 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학교 곳곳에 노동자들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소리 없이 울먹이며 비인간적인 처우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다. 빗소리 대표인 철학과 김윤혜(22)씨는 “기계전기 노동자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기계실에서 여름에는 40도가 넘는 더위와, 겨울에는 영하를 밑도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며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엄청난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감사원 감사결과를 보면 서울대 비정규직은 기간제(676명) 단시간(77명) 비전임교원(2,443명) 조교(366명) 등 4,235명에 달한다. 무기계약직(472명)을 포함한 정규 직원 및 교원 3,808명보다 많다. 기간제보호법은 동종 업무에 종사한 지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2013년 34%였던 서울대의 무기계약직 전환율은 지난해 13.6%까지 떨어졌다.
급기야 학교 측은 내년에 근무기간 5년을 채운 비학생조교 253명의 계약을 순차적으로 해지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조교에게는 기간제보호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다. 학생들은 비학생조교들도 ‘직원’이라고 항변한다. 빗소리 측은 “고용노동부도 조교는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는 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며 “서울대 비학생조교는 학업 없이 인사, 회계 같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는 만큼 기간제법의 수혜 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이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 다니며 받은 서명에는 학부생, 대학원생은 물론 교원과 직원 374명도 기꺼이 이름을 올렸다. 생명과학부에서 11년째 비학생조교로 일하고 있는 박지애(39)씨는 “학생들이 우리 얘기를 듣고 지지해 주니 힘이 난다”고 했다. 정재훈(25)씨는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지만 비정규직의 인간된 권리가 왜 필요한지를 주변에서 알아 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빗소리는 앞으로 비학생조교뿐 아니라 하청업체를 통해 이뤄지는 학내 간접고용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쏟을 예정이다. 빗소리 관계자는 “학교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 들여 동아리를 해체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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