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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피멍 든 보수의 민낯

입력
2016.12.1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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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대한민국 정부 일에 관여하기 싫다.’

최순실씨의 피부과 주치의였던 김영재 원장 부인 업체의 중동 진출을 지원하던 실무자가 이메일로 사표를 던지고 미국으로 떠나며 남긴 말이라고 한다. 14일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특위 3차 청문회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이 사업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기택 전 보건산업진흥원장도 청와대로부터 보복조치를 당해 해임됐다. 박근혜 정부의 속살이 이 정도까지 구차하고, 치졸했던가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벗겨진 것은 성형과 올림머리로 분장된 박근혜 대통령의 맨 얼굴만이 아니다. 문고리 3인방에 가려졌던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과 그를 보수의 아이콘이라 치켜세웠던 한국 보수층의 피멍 든 민낯도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나 조원동 전 경제수석의 무참한 행태는 한국 보수 엘리트가 어느 수준까지 추락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권력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정치 검찰 출신들의 하이에나 같은 속성이야 놀랄 것도 없다.

하지만 안 전 수석이나 조 전 수석은 어찌 보면 한국 보수 진영이 배출할 수 있는 최고급 엘리트에 속한다.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출신인 안 전 수석이나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 전 수석은 모두 서구 근대 합리주의와 자본주의 문명의 정수를 익힌 이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자유시장경제의 원칙과 어긋나게 기업들을 강박하고, 경영자를 쫓아내는데 충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령 최순실의 존재를 몰랐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지시가 보수의 기본적 가치를 어긴다면 간언은 못하더라도 저 실무자처럼 염증이라도 내고 자리를 떠야 하는 게, 우리가 보수 엘리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태도가 아닌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억울하다”는 조 전 수석의 항변은 어찌 보면 한국 보수의 빈곤한 멘탈리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 같다. 보수 엘리트가 지켜야 할 정언명령이 자유민주주의도, 시장경제 원칙도, 법치주의도 아닌 고작 깡패 짓 하는 대통령의 지시였다는 얘기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문명의 최후의 인간으로 제시한 ‘영혼 없는 전문가’가 막 다른 골목에 처한 한국 보수 엘리트의 현주소인 셈이다.

대한민국 성장기의 한국 보수는 나라의 안보를 지키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역사적 소임을 이행했다. 자긍심을 느낄 만했다. 그러나 한국이 성장 정체기에 들어서면서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기간 보수는 국가를 운영하는 자신들의 근본적인 가치와 원칙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과거 ‘하면 된다’는 단순한 정신이 통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반공’으로 국민 얼차려를 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다.

영화 ‘내부자들’은 한국 보수층이 국가를 운영하는 동력이 기득권 남성의 ‘성기 동맹’이라고 고발했다. 리얼리티 과잉으로 느껴졌던 이 영화는 그러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 영화였다. 이 영화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또 다른 동력은 강남 아줌마들의‘성형 동맹’ 이었다.

성기 동맹과 성형 동맹 외에 보수 진영에게 남은 것은 아스팔트 보수를 중심으로 한 ‘반공 동맹’ 밖에 없을 터다. 최근 소설가 이문열씨가 촛불집회를 두고 뜬금 없이 홍위병 타령을 한 것도 남은 밑천이 ‘반공 동맹’ 밖에 없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그간 손쉽게 반공에 의지해 합리주의를 희생시킨 결과다. ‘인천상륙작전’ 같은 영화만 만들다 보면, 한국 영화계가 망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이씨가 케케묵은 반공동맹에 기대는 것을 보면 한국 보수의 정신세계가 사실상 파탄 난 것으로 보인다. 한국 보수의 새로운 싹은 어디서 움터 나올 것인가.

송용창 정치부 차장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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