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양지원] 문정희는 몸과 마음이 고단한 재난 영화의 출연을 서슴지 않는 배우다. 영화 '연가시' (2012년)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더니, 7일 개봉한 재난영화 '판도라'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줬다. 한 번도 지치는 내색 없이 늘 밝은 표정과 긍정적인 자세로 작품에 임하는 문정희는 인터뷰 내내 밝은 에너지를 뿜어냈다.
문정희는 '판도라'에서 과거 원전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혼자 키우는 싱글맘 정혜 를 연기했다. 시어머니(김영애), 시동생(김남길)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비중은 작은데 인물이 표현해야 할 감정은 다양했고, '연가시'와도 겹치는 면이 있어 주변에서 출연을 만류했다.
"솔직히 캐릭터만 보면 마음에 든다고는 할 수 없었어요. 피난신도 '연가시'와 겹치는 장면이 있어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애로사항이 많았죠. 그러나 주제가 참 크게 와 닿았어요. 원전이 소재인 영화를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거든요. 이런 영화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시나리오 속 주제의 파급력에 기대를 걸었어요."
문정희는 박정우 감독과 무려 네 작품을 함께하며 의리를 과시했다. 박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잘 아는 문정희도 '판도라' 시나리오를 읽고 '세다'는 느낌을 절로 받았다.
"사회적인 코드가 부각된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셌어요. 작은 힘이나마 이 영화에 일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당연히 고생스럽기도 했는데 지나고 나니 저절로 잊혀졌어요. '연가시' 때도 마찬가지였죠. '재난영화 다신 안해!'라고 해놓고 또 재난영화를 찍었어요."
'판도라'에는 문정희와 '연가시'에서 호흡한 김명민이 무능한 대통령으로 특별 출연했다. 영화에서는 마주치는 장면이 없었으나 실제 촬영장에서는 서로 반가워했다.
'판도라'의 등장인물들은 피난팀과 구조팀으로 나뉘어진다. 피난팀은 문정희 김영애 김주현이 속해 있고, 구조팀은 김남길을 필두로 정진영 김대명 유승목 등이 촬영했다. 피난팀에 여배우 세 명이 모였지만 경계나 긴장감 따위는 없었다. 서로를 다독이며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도 깨진다고 하잖아요. 세대가 다른 배우 세 명이 있어서 골치 아픈 전쟁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런 건 없었어요. 김영애 선생님과는 '카트'에 함께 출연해 이미 친해요. 사실 이번 영화도 함께하자고 내가 제안했어요. (김)주현이는 연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열정이 넘치는 배우에요. 셋이서 함께 최대한 잘 촬영할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주현이가 신인이라 저와 김영애 선생님이 최대한 연기를 잘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주려고 했어요."
이런 세 배우의 노력은 스크린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특히 김영애와 문정희의 대립과 화해 과정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 정도다. 둘의 모성애 연기는 가히 압권이다. 문정희는 "저 역시 선생님의 연기를 보면서 코끝이 찡했어요"라고 말했다.
"선생님 덕을 정말 많이 본 것 같아요. 사실 지금 건강이 좋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모성 연기를 할 수 있다는게… 대단한 것 같아요. 영화를 찍으며 어떤 배우가 상대역을 하느냐에 따라 극의 힘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선생님의 열연을 보며 '배우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판도라'는 영화의 특성 상 원자력에 대한 사전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문정희는 스스로 정보를 찾으며 공부했다.
"원자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요.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서 조금은 알게 됐는데, '정말 이런 사고가 나면 큰 문제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에 재난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었는데 늘 대비책이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웠어요. 이제라도 우리 스스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작품이 되길 바라요."
문정희는 두 번이나 재난영화에 출연한 만큼 사고를 감지하는 능력이 발달했다며 웃었다.
"이제 웬만한 건 믿지도 못할 것 같아요. 사고가 터지면 늘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거든요. 왜 지진이 나면 늘 식탁 밑으로 들어가잖아요. 건물 자체 시설을 믿지 못하는 것이죠. 저 역시 유독 재난에 대해서는 예민해요. 지진도 다 느껴지고 여진도 감지되요.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있을 때 대처 방법이 좀 빠른 편이에요. 느낌대로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문정희는 또 여전히 남풍(男風)인 충무로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부자들'과 '아수라'를 보며 씁쓸함을 안고 극장을 나섰다. 여성 캐릭터가 영화에서 조금이나마 빛을 내길 바랐다.
"최근에 영화 '미씽'을 재미있게 봤는데 여성 영화들이 좀 더 잘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화가 많아졌으면 해요. '판도라' 뒤풀이 때 어느 감독이 '극장 주도권이 여자에게 있으니 잘생긴 이병헌, 정우성을 보러 가지 않겠나'라고 말했어요. 당연히 인정하는데 여성 캐릭터가 작품에서 소모적으로 쓰이는 게 싫을 뿐이에요. 여성의 배역 자체가 영화의 코드 안에서 자신의 색을 낼 수 있는 작품이 있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판도라'의 정혜는 소모적으로 쓰이지 않아 만족해요." 사진=임민환 기자 limm@sporbiz.co.kr
양지원 기자 jwon04@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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