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생활 탐구 <1> 민주주의 플랫폼 개발자 조합 ‘빠흐띠’
국회를 압박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가결을 이끌어낸 촛불 시민들에게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강력한 무기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노와 바꾸자는 열망이 인터넷을 타고 폭발했다. 정보를 공유하며 스스로 배우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주체적 개인들이 광장에 모여 거대한 연대를 이뤘고, 온라인과 광장의 결합은 더 큰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디지털 기술이 정치 혁신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기술로 더 나은 민주주의를 개발하려는 팀이 있다. 협동조합 형태의 소셜벤처 ‘빠흐띠’는 ‘유쾌한 민주주의 플랫폼 개발자 조합’이다. 지난해 10월 설립됐고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 6명으로 이뤄져 있다. ‘빠흐띠’라는 이름은 정당을 뜻하는 프랑스어(Parti), 파티(Party)처럼 즐겁게 참여(Participation)하는 정치를 지향한다.
빠흐띠가 개발하는 것은 도구 그 이상의 가치다. 권오현 대표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며 “개인의 일상부터 거대한 시스템까지 기술적 도구를 활용해 더 나은 민주주의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빠흐띠의 목표”라고 설명한다.
빠흐띠가 만들고 싶은 정치 플랫폼을 권 대표는 물고기떼에 비유한다.
“거대한 고래나 상어가 아니라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무리를 짓듯, 각자의 개성과 판단에 따른 집단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전체 조직의 나사나 피라미드 구조의 하부가 아니라 독립된 존재들이 함께 모여 전체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그들을 주체로 초대하지 않고 소품으로 가져다 쓰기만 하는 현재의 정치를 혐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도전은 “인터넷은 기존의 인류가 IT기술이 없어 불가능했던, 집단지성을 바탕으로 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험해볼 가능성을 열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기술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빠흐띠의 목표다.
지난 1년 간 빠흐띠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온라인 서비스를 개발했다. 첫 실험은 올해 초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국회의 필리버스터 상황에서 진행한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국민의 편지’였다. 32만 7,166명이 투표에 참여해 3만 4,676개의 의견을 냈다.
6월에 시작한 ‘나는 알아야겠당’은 GMO 완전표시제법의 입법을 위해 뭉친 시민들의 온라인 프로젝트 정당이다. 당명과 강령을 당원들이 직접 정하고 공동 편집했다. 법적 지위를 가진 정당은 아니고 입법에 성공하면 흩어지는 조직이지만, 오프라인 창당파티도 했다. 현재 당원은 811명이다. GMO완전표시제법은 각 정당의 주요 공약에 대한 직접투표에서 5,470표를 얻어 채택됐고, 17만 명이 서명했다. 이후 입법안의 쟁점을 토론해 국회의원에게 전달했다.
알아야겠당이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이 이슈로 모여 국회 앞까지 가보는 실험이라면, ‘국회톡톡’은 국회 안으로 들어가는 시민 입법 플랫폼이다. 시민 누구나 입법 제안을 올릴 수 있고, 다른 시민 1,000명의 지지를 받으면 입법을 맡을 국회의원과 연결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국회 해당 상임위원회 의원에게 이메일로 제안을 보내 2주 동안 참여, 무응답, 거부의 세 가지 답변을 받고, 참여하겠다는 의원이 있으면 시민과 의원이 협업을 시작한다. 진행 상황은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시민이 청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51건의 입법 제안이 나왔고, 그중 만 15세 이하 어린이의 병원비 국가 보장, 근속연수가 모자라 휴가를 쓸 수 없는 신입사원이나 복직자의 휴가 보장, 전자영수증 소득공제 등 3건이 의원 매칭에 성공해 진행 중이다. 이밖에 기본소득제, 투표 연령 만18세로 인하, 임신 중단 합법화 등 다양한 제안이 올라와 있다.
탄핵 정국으로 빠흐띠는 더 바빠졌다. 내년에 오픈하려고 개발 중이던 직접민주주의 플랫폼 ‘우주당(우리가 주인이당)’을 열었다. 하루 만에 8,000여 명이 참여했다. 페이스북 그룹으로 모인 사람들이 프로젝트 정당을 구성하고 우주당이라는 이름을 정하는 데 8시간도 안 걸렸다. 새누리당 해체를 요구하는 ‘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서명을 시작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아카이브, 세월호 아카이브, 청소년들의 정치 플랫폼 ‘틴즈디모’, 탄핵 이후를 토론하는 ‘함께 그리는 새로운 대한민국’ 등 20개 가까운 정치 캠페인 여기서 벌어지고 있다.
우주당 당원들은 오픈 커뮤니티인 ‘빠띠’로 모인다. 빠띠는 투표, 토론, 아카이빙 기능을 갖춘 시민 주도 공론장이다. 누구나 빠띠를 만들 수 있다. 정치 활동뿐 아니라 소소한 덕질을 위한 빠띠도 가능하다. ‘나만 고양이 없어’ ‘웹툰본당재밌당’ 같은 빠띠가 ‘기본소득받고싶당’ ‘페미니즘’ ‘더 나은 민주주의’ 빠띠와 나란히 우주당 은하계를 구성하고 있다.
‘카누’는 빠흐띠가 개발한 의사결정 도구다. 일상 민주주의와 민주적인 조직 구조를 실현하려는 그룹을 위한 서비스이고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오픈소스다. 그룹 만들기, 제안, 토론, 투표를 쉽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설계됐다. 토론을 하다가 생각이 바뀌면 자신의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 기계적 다수결이나 선택지가 한정된 투표로는 흡수하기 힘든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수평적 협력을 통해 합리적 결정에 이르도록 돕는 소프트웨어다.
빠흐띠 멤버들은 재택 근무를 한다. 일본, 서울, 제주, 보성 등으로 사는 곳이 서로 달라 월 1회 모임을 빼면 협업용 메신저 슬랙, 화상대화, 구글 행아웃 등 여러 도구를 사용해 원격으로 함께 일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유쾌한’ 민주주의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덕업일치’ 사회를 꿈꾼다. 권 대표는 “개인으로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문제 해결 방식도 예전과 달리 놀이에 가까워졌다”고 본다. 그는 “분노보다 강한 게 놀이정신”이라며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즐겁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런 덕업일치 사회를 만드는 것이 빠흐띠의 덕업일치”라고 설명한다. 아닌 게 아니라 축제가 된 이번 촛불시위가 그렇다. 권 대표가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링 위에 올라가 설명하고 최종 선택은 국민이 하는 게 민주주의다. 전문가가 선택하고 국민은 동원되는 시대는 지났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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