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촛불, 정치를 디자인하다

입력
2016.12.14 14:47
0 0

‘정치는 예술’이라는 말에는 진정성이 없다. 차라리 정치가 디자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겠다. 디자인은 예술과 다르다. 예술이 생명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디자인은 생명 자체에 집착한다. 이를테면 갓 태어난 아이에게서 생명의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그 생명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디자인이다. 예술이 개인의 창의성에 의존한다면 디자인은 대중의 생활 속에 뿌리를 둔다. 전자가 엘리트적이라면 후자는 대중적이다.

서양건축이 예술이라면 우리 건축은 디자인이다. 사람이 머무는 건축은 건물뿐 아니라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삶까지 짓는 것이고, 그래서 자연과 생활이 만든 건물의 변형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진화해온 한옥의 건축적 사유방식이다. 이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생각이기도 하다. 건축에 대한 그의 철학은 디자인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 생명은 생활 속에서 보호받고 인간은 그 속에서 자신을 자각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건축 디자인은 존재론적 가치를 획득한다. 여기에 한옥과 하이데거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혁명을 나라를 다시 세우는 건축에 비유할 수 있다면, 눈앞에서 벌어지는 촛불혁명은 매우 낯선 것이다. 지금까지의 혁명은 가치를 선점한 자들이 민중을 선동 또는 지도하여 성취했다. 프랑스혁명이 그랬고, 러시아 혁명이 그랬다. 자유며 평등같이 추상적 가치를 내세운 과거 혁명과 달리 촛불 혁명은 어떤 사상도 제시하지 않고, 또 국민 자체가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는 민중혁명이며 생활혁명이다. 이는 마치 기둥과 대들보를 확인할 수 없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빌딩처럼 근대 역사에서 매우 낯선 형태의 혁명이다.

일부는 광장에 불어 닥친 혁명을 대통령에 대한 불만으로 폄훼하고 싶겠지만, 촛불혁명은 국민의 생명과 생활을 보호하지 못한 국가 시스템에 대한 폭발이다. 당치도 않은 가치를 내세워 생명을 짓밟는 정치를 세월호의 비극을 통해 실감했고, 메르스 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생명보호에 뛰어난 무능함을 확인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통해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 터져 나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우리는 지난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통째로 읽어냈다. 역사 인식에도 집단적 직관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리라.

추상적 가치를 내걸지 않은 촛불혁명의 지향점은, 생명과 그 생명을 구성하는 생활이다. 자유며 평등 같은 가치가 오히려 국민의 생명과 생활을 파괴하는 정치도구였다는 걸 확인했고, 법치의 허구성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국민은 적법 절차, 질서 있는 퇴진에 결연한 야유를 보내고, 헌법적 가치를 빌미로 자행하는 불법과 야만적 행위를 조롱하며 마당놀이를 하는 중이다.

국민은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고 그 생명을 유지할 생활 복원에 나섰다. 이제 국민은 언제든 소수의 이익에 봉사하는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생명과 생활을 보존시키는 체제로, 대한민국을 재건축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탄핵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렇게 디자인된 체제 위에서만 자유든 평등이든 실현 가능하다는 걸 직관적으로 터득한 것이다. 국민이 생명에 반하지 않는 평화로운 축제를 선택한 이유도 거기 있다. 기득권 해체를, 헌법적 가치로 치장하여, 대한민국 해체로 과장하는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 이제 박제된 구체제의 둥지를 박차고 나와 국민 모두가 함께 사는 길에 나서야 한다. 촛불의 열망을 담아 민중의 생명과 생활을 담아낼 새 체제를 낳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정치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면 어딘가 한옥을 닮은 저 광장의 촛불은 위태로운 세계 평화에 소통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 촛불혁명은 생명과 이를 지지하는 생활을 주장할 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가치 아래 세계에 범람하는 분열과 증오에 치유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