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여름휴가 독서목록은 언제나 화제가 된다. 대통령이 고르는 책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휴가 독서목록에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넣어 열풍에 일조한 적도 있다. 독서광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직사회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땐 책을 활용해 ‘독서정치’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휴가 독서목록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해당 출판사 특혜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실은 책을 읽지 않아서라는 게 정설이다. “그의 서재에는 제대로 된 책이 없다”고 했던 전여옥 전 의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 박 대통령이 책은 기피하고 TV를 즐겨 봤다는 얘기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박근혜 일기’에 수록된 40년 가까운 세월의 기록에서 박 대통령이 책을 읽은 사실을 언급한 경우는 네 번밖에 없지만 TV 시청과 관련된 언급은 상당히 많다고 우리말 연구자인 최종희씨는 저서에 썼다. (‘박근혜의 말’) 주로 시청한 방송은 드라마와 동물다큐멘터리, 어린이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이 저녁 8시 이후에는 만사 제쳐 두고 TV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만 봐 연예인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라는 소문도 있다.
▦ 최순실 사태를 통해 박 대통령의 공감 능력과 분석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입증됐는데, 그 이유는 독서를 거의 하지 않은 탓일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조리장을 지낸 한상훈씨는 채널A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평소에도 TV를 보면서 혼자 식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에도 관저에서 낮 12시와 오후 6시 점심과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식사를 하면서 TV 생중계로 현장상황을 지켜봤을 텐데 태연히 관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게 놀랍고 어이가 없다.
▦ 국회 탄핵안 가결로 직무정지가 된 박 대통령이 ‘관저 유폐’ 생활에 들어갔다. 청와대는 관저에서 독서 등으로 소일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으나 믿기 어렵다. 줄어든 업무만큼 TV시청 시간만 늘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을 부정하고 남 탓하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그동안 보지 못한 책을 접하는 소중한 시간이 됐으면 한다. 굳이 권한다면 민주주의와 정의의 가치를 일깨우는 책이면 좋겠다.
이충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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