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이 반드시 다수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열에 아홉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당사자만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최순실 게이트로 국민의 90% 이상이 등을 돌렸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의 입에선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는 말이 나온다. 전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나라 꼴을 보며 국민들이 흘린 피눈물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아니라, 탄핵 가결로 청와대에 사실상 ‘유폐’된 것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가 담긴 것 같다. 탄핵안이 통과됐음에도 여전히 촛불을 들고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섭섭함을 넘어 배신감에 따른 적대감마저 느끼는 듯 하다.
어쩌면 이렇게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상식에 따른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심리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행동은 자신의 의도와 전략에 따른 것이 아닌 누군가(최순실)의 지시에 좌우되는 ‘꼭두각시’ 행동이라거나, ‘자기애성 성격장애’(공주병)로 보기도 한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루이 14세처럼 “짐이 곧 국가”라고 여기기 때문에 초법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아무런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심지어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ㆍ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인 ‘리플리 증후군’과 비슷하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리플리’는 미국의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범죄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인데 재벌 아들인 친구를 죽인 뒤 거짓말과 행동으로 친구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인물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어 마음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박 대통령에게 호의적인 시선은 ‘스톡홀름 신드롬’의 피해자라는 분석이다. 이는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돼 오히려 범인들을 지지하고 보호하려는 심리를 뜻한다. 박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걸림돌이 됐던 최순실 일당의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그들을 두둔하고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여러 분석에도 박 대통령이 정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박 대통령이 40년 이상 보통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10대부터 20대 후반까지 청와대에서 폐쇄된 생활을 했으니 타인과의 소통ㆍ공감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과 비슷한 상황 인식이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재벌 총수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죄송하다”, “송구스럽다”, “국민께 심려를 끼친 점 반성한다”며 한결같이 고개를 숙였지만,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무엇 때문에 죄송한지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피해나갔다. 미르ㆍ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헌납했으면서도 뭘 바라고 돈을 낸 게 아니니 대가성은 없었고, 여러 특혜 논란은 돈을 낸 것과 관계가 없으며, 청와대에서 요청을 하면 기업 입장에서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억울하다”고까지 말한 총수도 있었다. 재단 지원 외에 최순실에게 수십 억원이 넘는 돈을 지원한 것에 대해서는 아래 사람이 내린 결정이라 잘 모른다는 대답까지 똑같았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대답 속에는 정경유착에 대한 반성 보다는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는 억울함과 ‘난감한 상황은 일단 넘기고 보자’는 속내가 읽힌다. 정부에 돈을 뜯긴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라는 주문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 ‘기회가 된다면 굳이 특혜를 마다할 것까지 있겠느냐’는 속셈도 엿보인다.
재벌 총수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기에 자신들을 국정 농단의 공범으로 비판하는 촛불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을 잘못했는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면, 정권의 위기처럼 기업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한준규 산업부 차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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