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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를 낳아라”… 모든 엄마는 죄인입니다

입력
2016.12.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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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녀에게 방공호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일러스트 김경진 기자
부모는 자녀에게 방공호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일러스트 김경진 기자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어요. 무능력한 아빠는 늘 술만 먹었고, 엄마는 항상 돈 벌러 나가야 했죠. 아빠는 술만 마시면 악마가 됐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간경화 말기로 생사를 오갈 때 결국 집을 나갔는데,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아빠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네요. 엄마가 너무나도 보고 싶고 그리웠는데도 말이죠. 엄마는 결국 다른 남자와 재혼했고, 그렇게 연락이 끊겼어요. 그때 제 나이 여섯 살이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먼 친척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살았어요. 여섯 살에 들어간 그곳에서 그 집 남자들에게 성추행도 많이 당했네요. 힘들어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상실감과 두려움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악물고 발악했죠. 나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했는데, 그게 많이 서럽고 힘들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죽을 생각만 했었어요.

성장과정도 불행했는데, 이제 결혼해 살 만하니 아픈 아이를 낳았네요. 그게 너무 억울하고, 미치겠고,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마냥 환장할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불행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아이가 이렇게 선천적인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맘을 굳게 먹어도,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다른 건 내가 다 어떻게 하겠는데, 이건 어찌 해 볼 도리가, 도리가 없어요….

출산 2주 앞두고 얼굴에 심각한 기형이 있다는 얘길 듣고 속수무책으로 울기만 하다 아기를 낳으러 갔습니다. 임신 중 내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구순구개열인 걸 몰랐다고 하더군요. 여자에게 출산은 가장 큰 축복인데 제 출산은 숨겨야 하고, 드러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임신 중에 뭘 먹었길래 아이가 이렇게 태어났냐”는 원망도 들었어요. 아이 얼굴을 수술하기 전엔 시댁에 오지 말라고도 하더군요. 아이를 낳고 전 죄인 같았어요. 이렇게 내 존재를 부정 당해야 하나 끝도 없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돌도 되기 전에 큰 수술을 두 번이나 치렀습니다. 고작 5㎏밖에 안 나가는 딸아이를 품에 안고 수술실에 들어가 기다렸다가 내 눈앞에서 마취가 되어 픽 쓰러지는 걸 보고 숨통이 끊어지는 줄 알았어요. 수술 전후의 금식도, 수술 후 통증으로 한 달 넘게 제대로 못 먹는 것도 제 눈으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어렸을 때 부모 없이 외로이 큰 건 상처도 아니에요. 차라리 내가 팔다리가 없고, 내 얼굴이 그럴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요.

아이가 태어나고 21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제 가슴속은 아직도 돌덩어리에 짓눌려 답답하기만 해요. 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밤에도 두세 시가 넘도록 잠을 못 잡니다. 잠을 못 자니 늘 아이에게 신경질을 내고, 더 나쁠 땐 때리기도 하네요. 아이의 안면기형은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어요. 아이 얼굴이 왜 이러냐는 낯선 이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도, 위로랍시고 던진 말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만 해요.

무엇보다 아이 키우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저를 키워주신 먼 친척 부부도 참 불행한 분들이었어요. 그런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들이 지금까지 제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내 새끼, 참 예쁜 아이인데, 징징거리거나 떼를 쓸 때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요. 아이를 때리거나 고함치고 윽박지르는 저 자신이 부끄럽고, 엄마에게 벌써 ‘아이씨’ 같은 말을 하는 아이를 보며 또 부끄럽습니다. 아이는 나처럼 불행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때론 아이가 짐스럽기도 해요. 행복한 아이로 잘 키우고 싶으면서도 내 상처받은 감정들을 돌보기에도 버겁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와 붙어 있으니 숨통이 조이는 것만 같아요.

스무 살 넘어 수소문해 보니 엄마는 재혼해 아이 낳아 기르며 살고 있더군요. 아빠 같은 남자 만나 혼자서 살림 책임지며 악착같이 살고 있다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엄마는 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냐고 물어봤는데, 소식 들려준 분이 엄마 찾지 말래요. 아마도 안 보고 싶다고 한 것 같아요. 엄마는 왜 내가 안 보고 싶을까….

저는 우리 아이한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내 아이, 정말 잘 키우고 싶어요. 우리 엄마 같은 엄마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복잡한 제 감정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나승연씨ㆍ가명, 31세, 전업주부)

“승연씨 이야기를 읽다가 몇 번이나 울었습니다. 지금도 자꾸 눈물이 나네요. 이 가여운 사람, 얼마나 힘들었을까, 손을 꼭 잡고, 등을 쓸어주고 싶어요.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는 승연씨에게만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승연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란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생명의 시작이자 생존의 기반이죠. 그리고 전쟁터의 방공호 같은 존재입니다. 머리 위에서 폭탄이 쏟아져도 부모한테 가 있으면 편안하고 안전할 것 같은 느낌, 거기에 가면 보호받는다는 믿음, 이것이 아이들이 생각하는 부모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승연씨에게 아버지는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벗어나야 하는 존재였죠. 전쟁터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거예요. 어디서 폭탄이 날아올지 모르는데, 뛰어야 살 수 있는데, 어디로 뛰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발은 아파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방공호가 돼 줘야 할 아버지가 전쟁터이자 핵무기인데, 어떻게 어디로 도망갈 수가 있었겠어요.

엄마 역시 승연씨에게 방공호가 돼 주지 못했습니다. 고작 여섯 살 나이에 엄마가 벗어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승연씨는 정작 엄마로부터 보호는 받지 못했어요. 오히려 아버지는 승연씨 내면에서 두렵고 좋아하지 않는 존재로나마 표상화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는 규정을 잘 못하고 있어요. 보호자의 이미지로 전혀 표상돼 있지가 않아요. 엄마가 아니라 언니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아마 승연씨는 엄마를 떠올리면 ‘나 살자고 도망갔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을 거예요. 엄마의 마음 안에 나의 자리는 전혀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엄마는 두 번째 결혼에서는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요. 또 그런 남자를 만났는데도 왜 도망 안 가고, 고생하면서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걸까요. 차라리 엄마가 버림받고 홀로 기구하게 살고 있다면 덜 억울하고 분통했을 거예요. ‘나는 뭐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엄마는 나를 버렸을까?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미웠을까? 나를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고? 도대체 왜?’ 차라리 엄마 소식을 모르는 것보다 더 원통하고 몸서리쳐졌을 겁니다.

평생 동안 보호자가 없는 삶을 살아온 승연씨.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승연씨. 아버지에게는 공격의 대상이었고, 엄마에게는 버려진 딸이었고, 친척들에겐 추행의 대상이었던 지난 날들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요. 나한테는 아무도 없다는 고독 속에서 어떻게 버티며 살아온 걸까요.

우리 한민족의 모성은 죄책감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엄마들은 스스로 고통 받습니다. 그 고통을 참아내고 인고하고 헌신하는 게 모성이라고 한국사회가 주입하지요. 결점 없는 완전무결한 아이를 낳아서 태양 아래 제단에 바치는 것, 그게 한국의 엄마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사명이 됐습니다. 평생이 맨발로 홀로 선 전쟁터 같았을 승연씨. 승연씨에게는 따뜻한 가족, 나와 피를 나눈 분신인 자식이 너무도 간절했을 거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바꿀 수 없는, 혈연이라는 걸로 똘똘 뭉친 가정을 구성해서 더 이상 외롭지 말아야지, 갈망했을 겁니다. 자식을 낳아 희생하고 키우면서 가족을 이룬다는 게 너무도 중요한 삶의 과제였을 거예요.

자식은 너무나 소중한 나의 생명이죠. 나의 뱃속에서 나온 나의 산물입니다. 승연씨에게는 아이가 너무나 소중한 구슬인데, 그 구슬이 너무 뜨겁습니다. 손을 대면 내가 데이고, 놓으면 구슬이 깨져요. 너무 소중해서 미워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존재인데, 나는 조건 없이 이 아이를 사랑하는데, 주변에서는 안 도와줍니다. 억장이 무너지게, 가슴이 찢어지게 사랑하는데, 이 아이가 눈이 없어도, 입이 없어도 나는 사랑하는데, 주변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어릴 때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처럼 차갑습니다. 내가 낳은 이 소중한 아이를 하찮게 봅니다.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닌데 세상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보고 대해요. 시댁에서는 나의 분신인 이 아이가 조건 없이 소중한 대상이 아닙니다. 억울하죠. 원통합니다. 왜 내 인생은 그렇게 슬픔과 외로움과 고독이 반복되는 걸까,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할 거예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은 엄마처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한 엄마처럼, 시댁에서도 내 아이를 하찮게 바라보는 게 견디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승연씨. 당신은 진짜 엄마네요. ‘정말 엄마군요, 당신은 정말 엄마예요’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어요. 수술방에 들어가 까무러칠 듯 고통스러워 하던 그 모습은 엄마이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쳐다보든 당신은 엄마예요. 내가 그렇게 바랐던 부모, 전쟁터의 방공호 같은 부모가 나 역시 못되고 있다는 데서 처절한 자기실망을 느꼈을 겁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지만, 아이의 불편한 감정표현을 잘 수용하지 못합니다. 본인이 부모에게 그런 감정을 수용받아 보지 못했으니까요. 생존을 도와줘야 하는 부모가 아니라 타인들에게 생존의 보조를 받았으니 얼마나 눈치를 보고 자기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겠어요.

그러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들이 추구하는 건 결코 완벽이 아닙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승연씨.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잘못하면 오늘도 후회하고 반성하며 내일은 잘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내일도 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똑같은 실수를 또 하면 또 반성하고 고치면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믿고 신뢰할 때 부모를 마음으로,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거예요.

승연씨가 사랑받고 크지 못한 건 사랑받지 못할 존재여서가 절대로 아니에요. 승연씨는 항상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였어요. 승연씨의 아이도 언제나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입니다. 신체라는 건 그저 하나의 옷 같은 거예요.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언제나 바뀌는 것이고, 외모의 아름다움은 아주 피상적이고 찰나적인 겁니다. 우리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인생이 아름다울 때 인간은 아름다운 거니까요. 마음에 안 와 닿을 수 있어요. 그러나 승연씨는 이 어려운 와중에도 진짜 엄마였고, 그건 아름다운 겁니다. 승연씨 딸도 이미 아름다운 아이예요. 그 아름다움의 가치는 얼굴이 조금 더 나아지느냐 마느냐와 관계 없어요. 승연씨의 아이는 언제나 소중하고 사랑 받을 만한 아이예요. 처음부터 그건 불변이에요. 얼굴이 남들과 조금 달라도 괜찮아요. 괜찮은 겁니다.

제가 오랫동안 상담한 아이 중에 오른쪽 손가락이 안 만들어져서 태어난 아이가 있어요. 성장 과정에서 겪게 될 문제들에 미리 대비하고 싶다며 아주 어릴 때 부모가 데려왔던 아이인데, 자존감 높이는 상담과 치료를 많이 했었죠. 지금 초등학생인데 손목에 줄넘기를 묶어서 학교에서 실시하는 줄넘기 급수를 다 땁니다. 처음부터 당당하게 자신의 장애를 드러냈어요. 처음에는 친구들이 “네 손은 왜 그래?” 묻죠. 그럼 이렇게 대답하라고 무지하게 가르쳤어요. “응.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났는데, 좀 불편하긴 해도 괜찮아. 근데 나 이것 때문에 속상했었어. 너희들한테 보여주기는 하는데 이걸로 너희가 웃거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당하게 꺼내놓고 다니니까 아이들도 금세 잊어버리고 신경도 안 써요. 아이들이 훨씬 더 열려 있고 잘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내가 줄넘기 묶어줄게” 하면서 도와줘요. 그래도 아이가 마음의 고통을 겪긴 하겠죠. 하지만 그 고통을 훨씬 덜 받을 순 있어요.

승연씨. 세모나게 생겼든 네모나게 생겼든 인간은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승연씨가, 또 승연씨 딸아이가 존귀한 존재라는 걸, 마음으로 느끼고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어른이 돼야 합니다. 남의 집 슬픔에 대해, 남의 집 아이의 어려움에 대해 정말 따뜻한 시각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불쌍해 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존귀함에 대해 진심으로 느끼고 수긍할 수 있어야 우리 모두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예요. 승연씨 모녀는 아름답고 존귀한 사람들이에요.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정리=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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