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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비아그라와 해명

입력
2016.12.1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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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논란은 의료계로 번져 나갔다. 청와대가 2015년부터 나랏돈으로 구매한 약품 목록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국민들의 호기심을 가장 크게 자극한 것은 발기부전 치료제의 대명사인 비아그라였다. 나는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비아그라의 고산병 치료 효과를 밝혔다가 시국 예언자로 몰리기도 했다. 방송 직후 청와대가 비아그라를 고산병에 대비해 구매했다고 해명했기 때문이다.

실제 비아그라는 고산에서 폐동맥을 이완시켜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하고, 폐부종을 예방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청와대의 해명은 과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으며, 이 처방이 항간의 소문처럼 불법도 아니다. 물론 아세타졸라마이드라는 우선 순위의 약제가 따로 있고, 그 외 교과서에 효능이 입증된 다른 약도 많다. 또 아프리카 순방의 최고 해발은 2,400m이나 비아그라가 3,000m 이상에서 발생하는 중증 폐부종에 사용함을 감안하면, 꼭 비아그라를 고산병 예방을 위해 364알이나 더 사야 했을까 의문이 든다. 하지만 나랏일이라 만반의 준비를 하려고 했다면, 일단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국민의 의혹과 불신은 의학적 사실 관계 너머에 있다. 같이 공개된 자료에는 태반주사 200개, 백옥주사 60개, 감초주사 100개, 마늘주사 50개 등이 거액을 들여 구매되어 있다. 이것들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이 현재 의학적인 근거가 입증되지 않은 약물이고, 국민들은 이 주사를 맞으려면 보험 적용 없이 자기 돈으로 맞아야 한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 규명되지 않은 주사를 나랏돈으로 잔뜩 사들여서 맞았다. 그리고 ‘경호원들의 건강을 위했다’고 궁색하게 해명한다. 처음부터 청와대가 약품을 구매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보살펴 공무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함이지, 나랏돈으로 몸보신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이 목록에선 눈먼 돈으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발상이 엿보인다.

심지어 이 목록에는 피부 미용 시술용으로만 쓰이는 엠라크림, 전립선이나 탈모 약인 프로스카, 엄청난 고가에다가 면역 질환 치료에 쓰이지만 노화를 방지한다고 알려져 있는 면역글로블린까지 들어있다. 이 약들은 피부미용병원이나 중환자실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쓸 수가 없는 약품이며, 이에 대해선 어떤 해명조차 없다. 공식적인 대통령 주치의가 청와대 의무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거나, 의학적 근거조차 없는 이런 약품들을 단독으로 다량 구매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문 지식과는 관계없이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최순실 게이트의 발단은 혈세로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처방 논란은 사건의 핵심을 비껴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시기에, 탐욕의 아수라장 같은 목록에서 하필 발기부전 치료제의 대명사인 비아그라가 들어 있었다. 여기서 이 약은 본디 용도와 다르게 고산병 때문에 구매했다는 해명을 어떤 국민이 믿어줄 것인가. 구차하게 들릴 뿐이다.

덧붙여 이 목록과 해명을 비교해 보면 이번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가 있다. 국민이 진실을 요구할 때,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면 그쪽으로는 단박에 잡아떼고, 그게 없다면 그냥 ‘건강을 위했다’ 정도의 뭉뚱그려진 해명을 하거나 침묵한다. 지난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도, 이번 게이트에서 보여준 여러 차례의 사과들도 그랬다. 점차 거짓이 탄로 나며 숨길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나고 그것을 또 다른 거짓된 해명으로 메꾸려고 하자, 국민들은 결국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와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리고 지난 9일, 그 목소리가 탄핵안 가결을 이끌어내었다. 이렇게 국민의 목소리가 강을 거슬러 오르듯 전달된 적이 있었을까. 뭉클하고 아릿한 느낌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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