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여야도 사라진 책임공백상황
행정부는 논란 없는 정책만 집행하고
국회는 국정견제 아닌 주체역할 맡아야
이제 박근혜정부는 없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올 때까지는 여전히 대통령이지만 호칭과 의전상 그렇다는 것일 뿐, 국민이 부여하고 헌법이 정해준 통치자로서의 수명은 국회 탄핵가결과 함께 종료됐다. 국회 이전에 민심의 탄핵, 촛불의 징계인 만큼 헌재가 무슨 결론을 내리든 정치적으로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 출범 3년9개월13일째 되는 날 박근혜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대통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소속정당을 뜻하는 여당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여당이 없으니 야당도 있을 수 없다. 새누리당은 더 이상 여당이 아니고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역시 더는 야당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여소야대도 사라졌다.
정권은 사라졌지만 국정까지 중단될 수 없다. 어찌 보면 살얼음판은 지금부터다. 여태까지는 딱 한가지 문제, 한가지 숙제만 있었다. 하야든 탄핵이든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 하지만 이 시점부터는 그를 끌어내렸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문제이고 모든 것이 숙제다. 대통령도 없고 여야도 없는 책임의 진공상태에서 경제는, 외교안보는, 갈등조정은 과연 혼란 없이 풀어갈 수 있을까.
행정부와 국회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해졌다. 아무 것도 안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아무 일 없는 듯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게 먼저다.
우선 행정부는 대통령 권한대행체제 하에서 ‘가장 작은 정부’가 될 수 밖에 없다. 국가안보, 민생경제안정, 사회질서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일만 해야 한다. 특히 갈등소지가 큰 인화성 과제들은 손 대지 말아야 한다. 황교안 대행을 비롯해 각 장관들은 행여라도 자신이 박근혜정부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이 정권이 추진했던 뜨거운 국정과제들을 어떻게든 마무리 짓겠다고 나서는 ‘오버’를 하지 않기 바란다.
성과연봉제? 어느 정도는 필요한 제도라고 본다. 하지만 지금은 접어야 한다. 국정교과서? 애초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 괜한 자존심 부릴 일도 아니고 억지로 출구전략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덮어야 한다. 창조경제? 문화융성? 이미 최순실 차은택의 치부 도구였음이 드러났다. 본래 취지가 무엇이든 더 이상 입에 올려서도 안 된다. 행정부는 이제 갓이 벗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얏나무 아래선 갓끈을 만지지 말고, 오이 밭에선 신발이 벗겨지더라도 신발끈을 매지 말아야 한다.
중압감을 느껴야 할 곳은 국회다. 대통령 권력이 폐기된 이상 의회권력이 그 자리를 채울 수 밖에 없다. 이제 국회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국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의원내각제의 실험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아마도 각 정당의 눈은 몇 개월 뒤에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5년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대선정국이 아니다. 책임 있는 수권정당의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먼저이고 결국은 그게 최선의 선거전략이 될 것이다. 촛불 속에는 국가시스템을 파괴한 대통령을 벌하라는 명령뿐 아니라 비정상이 된 국정을 정상화하라는 염원도 담겨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더 이상 거대야당이 아니다. 실질적 원내다수당으로 국정운영의 주체가 됐다. 그에 합당한 자세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벌써 집권여당이 된 것으로 착각해선 곤란하다. 이 점에서 추미애 대표가 정부-국회 정책협의체 구성과 경제부총리의 조속한 임명을 제안한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경제사령탑부터 하루 빨리 교통정리하고 시급한 법안이 있으면 밤샘 심의를 해서라도 통과시켜줘야 한다.
새누리당으로선 더 이상 재창출할 정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탄핵에 힘을 보탰다는 것만으로 모든 과거에 면죄부가 부여되는 건 아니다. 국정공백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늦었지만 속죄하는 길이다. 무엇보다 친박은 분이 풀리지 않아 국정운영에 비협조하는 식의 유치한 몽니를 부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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