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종종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주곤 한다. ‘로맨틱한 데이트’라고 하면 으레 신상 수트로 온 몸을 휘감은 ‘실장님’ 스타일의 남자와 가진 건 많지 않지만 미모가 빼어나고 성격도 씩씩한 여자가 역시 신상 옷과 가방으로 치장하고 야경이 멋진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한다. 이 클리셰에는 ‘두툼한 스테이크와 황갈색 소스’도 필수요소 중 하나다. 모든 창작물의 클리셰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레스토랑이라고 하면 프렌치 레스토랑이고, 프렌치 레스토랑이라고 하면 스테이크다. 현실의 클리셰 속 프랑스 음식은 값비싸고, 아무나 먹지 못하며, 저녁 내내 새하얀 테이블보를 씌운 사치스러운 레스토랑에 앉아 먹어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음식이 한국에 와서 고생이 많다. 사실 이런 오해는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먼 나라 가까운 음식
프랑스가 서양 음식 문화의 패권을 빨리도 잡은 탓이다. ‘프렌치 세계화’ 사업은 이미 중세 왕정 시절부터 성공했다. 프랑수아 피에르 드 라 바렌, 마리 앙투안 카렘 같은 요리사들이 등장해 궁정을 미식에 대한 탐닉으로 몰아갔으며,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같은 월드스타급 셰프는 19세기 말부터 1935년 사망시까지 ‘요리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현대 요리의 기초를 설립했다. 고급 지향적이고 화려한 오트 퀴진은 20세기 ‘요리의 교황’ 폴 보퀴즈 등의 뉴 누벨 퀴진 공세를 받는 동안 점차 다이어트 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 요리라면 무겁고, 아름답고 화려하며, 비싸다는 인식이 있다. 서울에서 집 한 채 갖지 못한 주제에 감히 넘봐선 안될 호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떨어진 얘기라고 보기엔 프랑스 요리가 너무 가깝다. 당장 식당 주방에만 가봐도 프랑스 요리 문화의 영향이 묻어 있다. 파트별로 나뉜 현대적 주방 구조와 요리사들의 업무 분담 방식을 규정한 것이 에스코피에의 업력이다. 에스코피에는 런던의 사보이 호텔에서 오페라 가수 넬리에 멜바를 위해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시럽에 졸인 복숭아, 라즈베리 소스를 한 데 낸 디저트 ‘피치 멜바’를 발명했고, 차가운 바닐라 커스터드 위에 설탕을 뿌리고 불로 그을려 만들어낸 살얼음판 같은 캐러멜층을 숟가락으로 탁탁 두드려 깨먹는 디저트 ‘크렘 브륄레’의 역사에는 폴 보퀴즈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제는 립스틱 색상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하는 피치 멜바, 그리고 영화 속 ‘아멜리에’가 조그만 숟가락을 들고 있는 이유인 크렘 브륄레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디저트 메뉴다. 드라마 속 스테이크의 갈색 소스 역시 프랑스의 것이다. 소고기나 송아지고기로 낸 육수를 졸여 버터에 밀가루를 볶아 만든 루(roux)와 합친 브라운소스, 혹은 그에서 변형된 소스다. 좀더 실생활로 가까이 오자면 역시 프랑스에서 시작한 소스인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은 돈까스가 나오기 전에 수프를 주는 경양식집의 간소한 코스 구성도 프랑스 요리의 영향이다.
의외로 소탈하고 생각 외로 만만한
시민혁명의 나라, 프랑스 음식이 모두 낭비벽만으로 이뤄졌으리란 추측도 성급하다. 사실 고급 요리로서의 프랑스 음식은 무겁다. 너무 무겁다. “프렌치는 버터, 이탈리안은 올리브 오일을 쓴다”는 농담만 놓고 보더라도 프랑스 음식의 체급이 느껴진다. 남부 지방에서 북상할수록 버터를 듬뿍듬뿍 쓰는 것은 사실이나, 몸통은 버터가 아니다. 후안무치한 공범은 소스 안에 있다. 엄청난 양의 재료가 끓여지고 졸여져 소스로 압축된다. 프랑스 음식이 고가인 데엔 재료비와 인건비 비중을 치솟게 하는 소스가 일익을 담당한다.
가난하지만 성숙한 시민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그런 재료집약적, 노동집약적인 음식을 해먹는 대신에 소박하고 재료 효율이 좋은 요리를 지역마다 개발하며 ‘가정식’의 계보를 이어왔다. 채소를 사용한 스튜 ‘라따뚜이’는 쥐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동명의 애니메이션에서 거만한 음식평론가의 심금을 울린다. 양파와 치즈가 주인공인 어니언 수프 또한 겨울철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들의 소울 푸드다.
서울에서는 몇 해 전부터 프랑스 음식에 대한 흐릿한 선입견을 깨는 식당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일찍이 와인이 대중화되는 동안에 어울리는 프랑스 음식을 겸하는 와인바들이 등장했고, 좀더 본격적으로 프랑스 음식을 안주 삼아 한 잔 하기 좋은 비스트로가 여러 가격대의 시장을 형성했다. 외식이 잦아질수록 발길을 이끄는 단어, ‘가정식’이라는 문구를 단 프랑스 식당도 대중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들급 프렌치 전성시대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낡은 골목에 자리한 렁팡스는 빛나는 신예다. 매끈하게 정돈됐지만 편안함이 흐르는 분위기에서 가벼운 런치, 그리고 가격도 맛도 질도 만족스러운 디너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인기다. 성동구 금호동의 한 아파트 상가에 있는 레스토랑 고메트리 역시 단품 위주로 맛난 프랑스 음식을 내 외진 위치를 뛰어 넘는 인기를 얻고 있다. 강남구 신사동의 루이쌍끄는 대표적인 비스트로로 자리잡았다. 파인다이닝 기준의 요리를 단품으로 꾸려 푸짐하게 내는 와인 선술집이다.
‘프랑스인 마을’ 서래마을의 터줏대감 프렌치 레스토랑 라싸브어의 세컨 브랜드인 르 쁘엥도 편안한 비스트로 콘셉트다. 옛 정서가 묻어나는 용산구 용산동2가, 해방촌의 비스트로 꼼모아 역시 좋은 음식과 와인을 함께하기 좋은 선술집이다. 마포구 상수동의 메르삐꽁은 비스트로보다 더 편한 어감을 주는 비스트로펍을 표방한다. 월요일이면 근사한 재즈 공연을 즐기며 저렴한 가격대의 음식과 주류를 즐길 수 있다.
마포구 연남동의 랑빠스81은 비스트로 대신에 리옹식 선술집 ‘부숑’을 표방한다. 프랑스인, 한국인 요리사가 함께 만들어낸 샤퀴테리(소시지, 햄, 테린 등 가공육)가 간판메뉴다. 용산구 이태원동 라플랑끄는 시끌시끌한 이태원역 뒷골목의 가정식 선술집이라고 하는 게 더 잘 어울린다. 리옹에서 온 프랑스인 요리사의 부숑이다. 마포구 연남동 앙프랑뜨 주방도 프랑스인 요리사가 꽉 잡고 있다. 밝고 쾌활한 분위기의 비스트로다.
비슷하게 만만한 가격대로 코스 요리를 경험해볼 수 있는 식당도 있다. 해방촌의 라마밋은 3코스, 4코스를 낸다. 어뮤즈부시와 에피타이저, 디저트는 통일돼 있고, 메인 메뉴만 고르는 방식이다. 어뮤즈부시, 혹은 디저트를 빼면 3코스가 된다. 양갈비 스테이크, 송아지다리 등 다양한 선택권이 주어지는 메인 메뉴에 따라 코스의 가격이 달라지는데 투박한 듯 화려한 프리젠테이션, 그리고 깊고 진한 맛이 특징이다. 마포구 연남동의 캐주얼한 레스토랑, 모던이스트는 그 대척점에 있다. 이곳의 요리사 역시 프랑스 음식을 배웠다. 허나 미국 CIA에서 유학하면서부터 독학으로 익혀온 현대적인 조리 테크닉과 조리과학을 십분 활용한 정교하고 탐미적인 음식을 한다. 어뮤즈부시,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프티푸르 5코스로 이뤄진 짧은 코스에는 시즌마다 이야기를 담는다. 올겨울은 코스로 나오는 접시 위에 백설공주 이야기를 풀어냈다. 제철 재료를 듬뿍 사용한 시즌 코스도 선택할 수 있다.
프랑스는 멀지만, 프랑스 음식은 더 이상 멀지 않다. 이 움직임의 중심에는 전적으로 사람이 있다. 직업으로서의 요리사가 꽤 근사한 위치를 갖게 됐다. 경영이나 미술 유학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리 유학을 가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유학길에 오른 젊은 요리사들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어차피 서양 요리의 패권은 여전히 프랑스의 것이고, 따라서 어느 대륙, 어느 요리사의 이름을 딴 학교엘 가나 배우는 것이 다 프랑스 음식 문화의 소산이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대학이나 요리학교에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워킹 홀리데이 등 제도를 이용해 외국에서 경험을 쌓고 오는 요리사들도 있다. 동시에 서울의 음식도, 입맛도 숨찬 속도로 다양화되고 있다.
더 이상 드라마에서 ‘두툼한 스테이크와 황갈색 소스’ 클리셰를 보지 않아도 될 때가 가까이 왔다. 그 때쯤이면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 앉아 티격태격, 아니면 오글거리게 썸타는 주인공들의 경직된 모습이 함께 사라져도 좋을 것이다. 대신 편안한 비스트로, 캐주얼한 레스토랑에서 신나고 편안하게 프랑스 음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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