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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마음을 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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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마음을 건다는 것

입력
2016.12.08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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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몸이 많이 약했다. 선친이 옻을 구해왔는데 체질에 안 맞았던지 옻독이 올라 심하게 앓았다. 어린 마음에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동네 장의사를 지나가는 게 무서워졌다. 중학교 때였는데 통학 길 버스에서도 도로변의 장의사 쪽으로 눈길이 가는 걸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금기를 지켜냄으로써 무언가 보상을 얻어내고 싶었다. ‘내가 장의사를 보지만 않는다면 어머니는 안 돌아가신다.’ 동네 장의사를 멀찍이 돌아가야 하고 늘 긴장해야 하는 만큼 나름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시절엔 장의사가 많기도 했다. 어쩌면 기도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어머니의 옻독은 내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종교가 있는 이들은 좀 더 많이,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얼마간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딘가에 걸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자면 많든 적든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어주어야 한다. 희생이라는 큰 말은 이런 마음의 길 끝에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우선은 내 경우 나 자신이나 가족의 울타리 너머로 제대로 마음을 내어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상투적인 이기심 타령을 하려는 건 아니다. 작은 단위에서부터 연결되는 사회적인 차원의 구축, 혐오와 배제를 줄여가는 공공적이고 민주적인 지평의 착실한 마련은 오히려 이기심의 합리적인 수용과 약속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희생’은 다분히 번제적(燔祭的)이고 억압적인 마음의 지평이며, 그 말의 쓰임이 제약될수록 좋을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그 제약 안에서 ‘희생’이라는 말을 숙고해볼 기회를 준다. ‘노스탤지아’(1983)에 나오는 도메니꼬라는 인물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겠다는 생각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집 밖에 못 나오게 한다. 가족들은 도망쳤고 그는 집에 불을 지른다.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회상 장면으로 미루어 그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던 것 같고, 영화가 진행되는 시점에 그는 폐건물에서 혼자 살고 있다. 온천수가 물안개를 피우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이다. 그는 가족만을 구하려 했던 자신을 이기주의자로 반성하고, 이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바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자면 우선 마을 광장 온천의 뜨거운 물을 초에 불을 켜고 건너야 하지만 광인 취급하는 마을 사람들 탓에 어렵다. 그는 이 일을 18세기 러시아 음악가의 평전을 쓰기 위해 마을을 찾은 이방의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에게 부탁한다. 안드레이는 망설임 끝에 초를 건네받는다. 영화는 도메니꼬의 구원에 대한 강박 못지않게 안드레이가 앓고 있는 상실과 불안의 고통을 오래 보여준다. 도메니꼬는 로마의 광장에서 자신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다. 그는 하찮은 벌레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며 광인과 병자, 소수자를 배척하는 세상을 질타한다. 이게 그가 말했던 또 하나의 촛불일까. 이 장면은 너무 아프다. 비슷한 시각, 안드레이는 초에 불을 켜고 온천을 걷는다. 두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온천의 끝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10분이 걸린다.

물론 ‘노스탤지아’는 이런 식으로 요약할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내내 생생하게 울리는 빗소리처럼 세상의 숨은 소리로 가득하며, 세상의 어둠과 빛으로도 충만하다. 비탄과 신음 속일망정 작은 기적의 순간들을 함께하는 영화일 테다. 생각해보면 안드레이가 촛불을 들고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온천을 건너가는 시간은 기실 도메니꼬의 폭력적인 희생을 막는 시간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폐가의 벽에 쓰여 있던 ‘1+1=1’의 낙서처럼 말이다. 영화 안에서 그 폭력은 저지되지 못했지만, 영화는 그 실패를 통해 우리에게 호소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섯 차례의 촛불집회는 국민 주권을 되찾아오는 축제의 혁명으로 진행되고 있다. 내 마음을 여기 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하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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