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짬뽕, 채식주의자, 샤샤샤, 구르미그린달빛, 픽미픽미, 나는 페미니스트다. 2016년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 파고든 단어들이다. 2017년엔 어떤 단어들이 대한민국을 수놓을까. 올해가 며칠 남지 않은 지금, 내년 트렌드를 예측한 도서들을 통해 2017년의 풍경을 미리 그려봤다.
나쁜 음식 먹겠다, 내일은 없으니까
웰빙이란 말이 국내 수입된 게 대략 2000년대 초반이다. 싯푸른 유기농 채소와 요가하는 사진으로 대변되는 웰빙 트렌드는, 허리띠를 졸라매며 정신 없이 달려온 한국인에게 새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열어주는 듯 했다. 그러나 2016년 각종 먹방과 쿡방에 주로 등장하는 음식은 건강과 거리가 멀다.‘2017 대한민국 트렌드를 읽다’(한국경제신문사)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식은 스파게티, 피자, 떡볶이, 튀김, 컵라면, 불닭, 햄버거, 치킨이었다. 올해 돌풍을 일으켰던 프리미엄 짬뽕라면과 대구에서 2015년 시작된 치맥페스티벌은 한국인의 밥상이 점점 더 기름지고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음식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지만 건강은 뒷전으로 밀려난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연구자들은 ‘지금 당장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과 맞닿아 있다고 분석한다. 건강이 “기본적으로 미래지향적인 개념”이며 “지금 당장 내 혀 끝에서 느끼는 자극적인 즐거움이나 몸의 편안함 일부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중장기적 관점의 자산관리”라면 당장 내일의 안위도 확신할 수 없는 헬조선 국민들에게 건강은 유난하고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2017년의 밥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카르페 디엠’이다.
고양이와 SNS, 비혼은 혼자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비혼 트렌드와 직결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행위, 즉 사회적 관계는 ‘미래를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효용이 큰 행위다. 그러나 미래가 사라진 이상 관계도 의미가 없어졌다. 관계의 가장 끈끈한 형태인 가족이 사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비혼인의 라이프스타일 중 ‘라이프 트렌드 2017’(부키)에서 주목하는 것은 고양이다. 닭장 같은 원룸, 늦은 퇴근 시간, 살림에 능숙지 않은 1인가구에게 조용하고 깨끗하며 독립적인 고양이는 최고의 반려동물이라 할 수 있다. 혼자 사는 이들은 자신의 고양이를 SNS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혼자지만 혼자 아닌’ 삶을 구현한다. SNS에 올라온 어린아이 사진에는 ‘네 자식 너나 귀엽지’란 냉소적 반응이 붙지만 고양이 사진에는 ‘네 고양이 나도 귀엽지’란 호의적 반응이 줄을 잇는다. 실제로 농림축산검역본부가 2012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반려 고양이는 2006년 47만7,510마리에서 2012년 115만8,932마리로 2.4배나 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게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의 반려동물 조사에서 고양이가 개의 수를 앞질렀다. 고양이가 세계를 제패할 날이 멀지 않았다.
불편하세요? 저는 죽겠습니다
정치적 올바름(PC)이란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통용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인종차별, 여성비하, 장애인 조롱, 아동 및 청소년 노동착취 등 사회적 약자들에 행해지는 폭압에 대해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들에게 붙여진 별명은 이른바 ‘프로 불편러’다. 그런 것 일일이 따져서 어찌 대의를 논하겠느냐는 꾸짖음에 프로 불편러들은 ‘너희가 프로 둔감러’라는 말로 응수했다.
2017년은 프로 불편러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전망이다. 4월 문을 연 미국 뉴욕의 한 슈퍼마켓에서는 손님이 직접 포장용기를 가져와 음식물을 포장하거나 가게에서 주는 재활용 용기에 담아가야 한다. 목적은 당연히 환경 보호다. 2013년 대리점주에 대한 ‘갑질’로 논란을 일으킨 한 식품회사에 대한 불매운동은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 중이다. 소비자들은 상품의 뒷면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해당 기업에서 아무리 매력적인 제품을 출시해도 구매 욕구를 눌러 참는다. 최근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키스신을 감독이 여배우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찍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쏟아지자 김도훈 허핑턴포스트 편집장은 그것을 “PC 정신병”이라고 지적했다가 논란이 확대됐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도 사사건건 트집 잡는 ‘PC 정신병’은 내년에도 지속ㆍ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사소함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안전이자 생존이기 때문이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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