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다. 이후에는 권력자의 노예가 된다.” 프랑스혁명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이렇게 대의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결함을 지적했다. 대의민주주의하에서는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잠시 위임받은 정치권력이 약속을 어기고 방종하더라도 이를 통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결국 배반당한 시민들은 광장으로 몰려나와 권력자에게 권력의 반환을 직접 요구하게 된다. 정치학적으로 보면 연일 전국을 달구고 있는 촛불은 바로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대한 사회의 권력회수 궐기이자, 대의민주주의 보정(補正) 운동이다.
하지만 이렇게 촛불은 뜨겁고 강렬한데, 이것이 곧이곧대로 정치적으로 반영될지 불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이미 형사범 취급을 받는 박근혜 대통령의 훤히 보이는 꼼수는 차치하더라도, 잔꾀에 능숙한 정치엘리트들이 이번에도 온갖 정치공학적 주판알을 튕기며 끊임없이 촛불을 교란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 뒷날을 도모하려는 몰염치한 여권이나, 촛불 쓰나미에 우왕좌왕하면서도 논공행상을 더 열심히 하는 야권이나 근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의 관심은 수용과 반성보다는 박근혜 이후의 권력 배분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된 정치엘리트들은 앞으로도 민심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담합과 이합집산을 거듭할 것이다.
1987년을 복기해보자. 그해 6월 29일 시민들의 민주화 항쟁에 굴복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헌법 개정은 여야 합의라는 형식으로 빠르게 추진됐다. ‘87년 헌정체제’가 우리 민주주의를 크게 도약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성립 과정에 ‘민주화’를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시민이 거의 배제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결과가 제왕적 대통령과 정경유착으로 상징되는 지금의 체제이다. 이를 두고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위로부터의 민주화’, 즉 정치엘리트 간의 ‘타협을 통한 민주화’(transplacement)라고 불렀다. 비꼬아 말하면 시민들이 피로써 얻어낸 민주화를 대의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정치엘리트들이 담합해 가로챘다는 것이다.
이런 주객전도를 다시 용인할 것인가. 촛불을 든 시민의 머릿수나 세면서 대의민주주의와 헌정주의라는 그늘에 숨어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정치엘리트들의 농단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촛불이 말하는 더 나은 민주주의는 결국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권력의 원천인 시민은 더욱 눈을 부라려 정치엘리트를 감시, 통제해야 한다. 이번 촛불은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을 바로잡는 강력한 주권의 발현으로서 역사에 기록돼야 한다.
내용으로도 이번 촛불은 30년 전의 그것과도 격이 다르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이 지긋지긋했던 군부독재에 대한 목숨 건 몸부림이었다면, 이번 촛불은 절차적 민주화 30년이 노정한 권위주의적 야만성을 일소하고 보다 좋은 세상을 지향하는 21세기 시민혁명을 호명하고 있다. 이번만큼은 시민이 주인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촛불은 박근혜 하야만이 아니라 이항대립적인 구태에 찌든 정치질서와 신자유주의라는 귀신에 씐 지 오래인 경제체제의 획기적 변혁을 내다보고 있다. 가히 체제 변환을 부를 수도 있는 혁명의 에너지가 권력의 원천으로부터 화산처럼 솟구쳐 오른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촛불은 돌출적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유럽의 극우화 조짐,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등 세계 곳곳에서 반이성주의와 퇴행적 반동이 뒤섞인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와중에 너무나도 지성적인 우리의 촛불은 고고한 등대처럼 암흑의 바다를 훤하게 밝히고 있다. 이 고결한 주권의지, 지고한 에너지는 대의민주주의의 모순을 메울 뿐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 되어야 한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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