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년 만에 모인 동창
2. 평일 회식을 주말로
3. 촛불 데이트도 확산
4. 가족 소통의 장으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6차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한 편에서 조촐한 송년회가 열렸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87학번 졸업생들이 한데 뭉친 것이다. ‘촛불 동창회’는 주말 집회 때마다 광장을 찾는 동기들이 적지 않은 점에 착안해 반가운 얼굴들도 보고 함께 정권 퇴진에 힘을 보태면 좀더 뜻 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모(48)씨의 아이디어였다. 25명이나 되는 동기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졸업한 뒤 20여년 만에 처음. 이들은 오후 8시 식사를 마치고 광화문광장에서 청운효자동주민센터까지 행진하며 “박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6일 “강원도에서 교사로 일해 그 동안 연락 한 번 못하던 친구 등을 촛불집회에서 만나게 됐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공지를 보고 모인 친구들과 앞으로 자주 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고 말했다.
여섯 차례 이어진 촛불집회가 많은 시민들에게 중요한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광화문이 ‘만남의 광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세대와 지역을 넘나드는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손을 맞잡은 덕분에 자연스레 소통의 벽까지 허물고 있다는 평가다.
12월 들어 첫 촛불집회가 열린 3일 광화문광장은 각양각색의 송년회 장소였다. 세종대왕상 인근에 돗자리를 깔고 구호를 외치며 수다를 떠는 동창회부터 집회가 끝날 무렵 쓰레기를 줍는 부부동반 모임까지 다양했다. 자영업자 박찬영(53)씨는 “2년 동안 또래 친구들과 온ㆍ오프라인 모임을 해 왔는데 올해는 촛불 송년회를 하기로 결정했다”며 “청와대 앞에서 힘껏 구호를 외치고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고 전했다. 부부 여섯쌍과 동반 송년회를 한 김정모(53)씨도 “광장에 작은 쓰레기도 남기고 싶지 않아 집회가 끝날 즈음에 만나 청소를 하는 모임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평일 회식을 아예 촛불집회 날로 옮긴 회사도 있다. 한 중소 홍보업체 직원 신모(53)씨는 “보통 매주 수요일에 팀 회식을 했는데 촛불집회가 시작된 후로는 토요일 같이 점심을 먹고 광화문광장에 간다”며 “박 대통령 퇴진을 바라는 직원들의 마음이 하나인 만큼 내키지 않은 회식을 하는 것보다 팀 화합에도 훨씬 낫다”고 설명했다.
젊은이들에게 광장은 이성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청춘의 공간이기도 하다. 직장인 김모(27)씨는 지난달 12일 이태원에서 소개팅 남성과 식사를 하고 광화문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행진에 동참했다. 김씨는 “대화를 하다 ‘촛불집회에 가고 싶다’는 의무감을 털어놨고 금세 의기투합했다”며 “처음에는 어색할까 걱정했지만 되레 깊은 유대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는 토요일 광화문에서 촛불 데이트를 권장하는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한 달 넘게 100만명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소통 장애물 역시 사라졌다. 세대와 지역, 이념의 차이 탓에 정치 얘기를 꺼렸던 가족과 회사동료들은 광장에서 토론 꽃을 피우고 있다. 친척 4가족과 6차 집회에 나온 이중헌(53)씨는 “각자 다른 지역, 환경에 살다 보니 정치적 신념이 많이 달라 명절 때 모여도 암묵적으로 정치를 이야기 주제로 삼지 않았다”며 “목적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촛불집회가 대화 장애물을 모두 제거했다”고 말했다.
덩달아 광화문 주변 상인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집회 전후로 수많은 모임이 이뤄져 행진 코스인 청운ㆍ안국동 상점들의 매출이 2,3배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광장 인근 한 삼계탕집 점주는 “계속된 촛불집회로 주말 단체예약 손님이 줄어들까 고민했는데 오히려 오랜 만에 회식을 하는 시민들이 늘어 평소보다 100그릇은 더 팔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민들은 사적 영역의 일과마저 광장에서 소비하며 불통의 시대를 극복하고 있다”며 “성난 민심은 짧게 스쳐가는 잔 바람이 아니라 박 대통령이 물러나는 날까지 광장을 휩쓰는 태풍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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