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유착의 민낯이 28년 만에 국회에서 또다시 드러났다. 1988년 11월 일해재단 청문회에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재벌 총수 6명이 출석한 이후, 아들 세대 재벌 총수 9명이 6일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장에 다시 앉았다. 정권만 바뀌었을 뿐, 재단 운용 과정에서 드러난 정경유착 구조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같은 모습이었다.
28년 전 청문회는 1983년 “버마 아웅산 폭발사고 유가족을 지원하자”는 명목으로 전두환 정권이 만든 일해재단 비리에서 시작됐다. 당시 일해재단의 대기업 강제 모금은 ‘5공 실세’라 불렸던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맡았다. 모금액은 총 509억원으로, 현대(정주영ㆍ51억원), 삼성(이건희ㆍ45억원), 대우(김우중ㆍ40억원), 럭키금성(구자경ㆍ30억원), 선경(최종현ㆍ28억원), 한진(조중훈ㆍ22억원), 롯데(신격호ㆍ20억원) 순이었다.
이번 청문회는 ‘전두환’을 ‘박근혜’로, ‘장세동’을 비선실세 ‘최순실’로, 일해재단을 미르ㆍ케이스포츠 재단으로만 바꾸면 똑같아진다. 시간이 흘러 모금액 규모가 774억원으로 늘고, 모금액을 결정한 재계 순위가 삼성(204억원), 현대차(128억원), SK(111억원), LG(78억원) 등으로 변했을 뿐이다.
재벌 총수의 청문회 증인 출석 방식 등은 미세하게 변했다. 88년 청문회는 정 전 명예회장을 비롯해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류찬우 전 풍산금속 회장, 장치혁 전 고려합섬 회장,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이준용 전 대림산업 부회장 등 6명의 재벌 총수가 이틀로 나눠 청문회장에 나왔다. 이번 청문회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손경식 CJ 회장, 허창수 GS 회장 등 9명이 같은 날 한꺼번에 증인석에 앉았다.
9명 중 정몽구 회장만이 아버지에 이어 2대 연속으로 청문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용ㆍ구본무ㆍ최태원ㆍ신동빈ㆍ조양호 회장 등 5명은 일해재단에 돈을 내고도 청문회에 불려오지 않았던 아버지와 달리, 생중계로 진행되는 청문회의 증인으로 채택됐다. 일해재단 청문회는 1987년 ‘6월 항쟁’에 따른 민주화 이후 전 전 대통령이 물러난 시점에 열린 반면, 이번 청문회는 박 대통령의 재임 중에 열렸다는 차이점도 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청문회에서 “88년 5공 청문회와 관련된 분의 자제 여섯 분이 여기 있다”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이번에 끊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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