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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범과 살인범의 왕국” 현실이 된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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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범과 살인범의 왕국” 현실이 된 디스토피아

입력
2016.12.0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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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편소설 ‘공포의 세기’를 낸 백민석 작가. 문학과지성사 제공
새 장편소설 ‘공포의 세기’를 낸 백민석 작가. 문학과지성사 제공

살인범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 부모를 죽이고 톱으로 썰고 피투성이 시체 옆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잡혀온 사람이 그리는 그림엔 뭐가 들어 있을까. 인과 없는 악행에 우리는 놀라고 찌푸리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매혹 당한다.

소설가 백민석은 살인범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자다. 그리고 독자는 그런 백민석을 들여다본다. 지면에 피를 흩뿌릴 때 작가의 표정은 뭘까. 어린 남자애를 납치해 포르노 비디오를 찍은 뒤 죽여 집 뒤 공터에 파묻는 평범한 교사 부부 이야기(‘목화밭 엽기전’)를 비롯해 광기와 폭력으로 물든 그의 모든 작품에, 독자들은 놀라고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매혹됐다.

신작 ‘공포의 세기’(문학과지성사)는 작가가 2013년 복귀한 뒤 처음 낸 장편소설이다. 1995년 등단해 8년 간 7권의 책을 낸 그는 2003년 돌연 절필을 선언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돌아와 다시 왕성한 활동에 돌입했다. 지난 10년이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만만치 않은 세월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에도 변화의 흔적이 뚜렷하다. 공백 기간 동안 기술직 노동자로 일했다는 작가는 이제 개인의 내면으로 꽉 채웠던 그림에 사회적 배경의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다.

주인공 모비는 흔히 하는 말로 정신병자다. 말이 늦고 왜소했던 아이는 중학교 때 같은 반 학생 둘을 불구로 만든 이후 끔찍한 범죄 행각을 이어간다. 자신이 일했던 레스토랑 사장의 혓바닥을 가르고, 불량 청소년의 머리통을 부숴 뇌를 드러낸 뒤 가까이 와서 보라며 라이터를 켜고, 상인연합회 회장의 눈알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린다. 모비의 양부는 아들의 담임선생님에게 더듬대며 말한다. “그냥…우리 아들놈한테는 창문이 없어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 안 달려 있어요.”

‘선천적 괴물’인 모비의 일대기는 ‘후천적 괴물’인 다섯 사람, 경, 심, 령, 효, 수의 이야기와 교차 전개된다. 경리, 카페 주인, 영업부장 등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삶은, 실은 크고 작은 폭력에 뿌리 박혀 있다. 가족에게 성폭행 당하고 지금은 동거남으로부터 얻어 맞는 여성, 수십 년간 아내와 자식을 두드려 패고 “가장의 권위”를 말하는 남성, 16세에 가출해 술집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함께 강도 행각을 벌이는 소녀. 이들은 어느 순간 각각 다른 상황에서 같은 성경 구절을 접하게 되고 주변인들을 살해한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하늘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작가는 모비로 표상된 인간 근본의 악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내재된 악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과정을 판타지적으로 그려낸다. 모비의 음성을 들은 다섯 사람은 같은 날 온 몸에 불을 지른 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향해 돌진하고 이 무차별테러는 도시 전역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온 도시가 불타는 광경을 황홀한 눈으로 지켜보는 모비가 있다. 지옥의 왕, 적 그리스도다. “그는 왕국 위에 서 있었다. 왕국 중의 왕국, 강간범과 살인범들의 왕국이었다.”

백민석의 엽기는 한때 상징으로 가득한 추상화였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추상은 구상이 됐고, 작가는 구상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 이번엔 지옥의 바닥까지 도망쳐야 했다. 다음 10년, 백민석은 또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세상은 살아서 지옥이었다. 지옥이 아닌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 극소수가 자신의 삶을 지옥이 아닌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삶도 지옥이었으니까.”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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