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위험 일반인보다 8.3배 높아
피해자인데 죄인의 삶 살아
정부 관련 예산 거의 없어
전국 자살예방ㆍ정신건강센터 중
15곳만 유가족 사업 진행
‘국민은 자살위험에 노출되거나 스스로 노출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자살 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 제3조 제1항) 하지만 자살 유가족은 이 권리마저 없다. 10년 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면 자살유가족 관리가 필요한데 말이다.
지난해 자살 사망자는 1만3,513명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 사람이 자살하면 최소 5~10명이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자살 유가족 지원체계 확립을 위한 기초연구’ 자료에 따르면 국내 자살 유가족은 8만3,000명이다. 박지영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족이 자살하면 유가족은 심리적으로 심각한 우울, 불안, 트라우마를 겪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해 자살시도 등 극한상황에 갈 수 있어 국가ㆍ사회적 지원과 관리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하규섭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살 유가족은 자살 위험이 일반인보다 8.3배 높고, 우울증도 7배 늘어난다”고 말했다.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지난해 실시한 ‘심리부검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31.8%가 가족, 친지, 친구, 선ㆍ후배 등 가까운 사람의 자살을 경험했고, 가까운 사람의 자살을 경험한 사람(24.0%)은 그렇지 않은 사람(17.7%)보다 우울감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을 심각히 생각하는 비율도 경험자(21.3%)가 그렇지 않은 사람(9.9%)보다 훨씬 높았다.
자살 유가족, ‘죄인’ 삶 살아
자살 유가족 삶은 비참하다. K(35ㆍ여)씨의 남편은 2012년 겨울 자살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삶을 비관한 K씨 남편은 종종 아내에게 “같이 죽자”고 말했다. 너무 힘들어, 삶이 팍팍해 그러는 줄 알았지만 남편이 정말 자살할지 몰랐다. 장례 후 K씨는 자신이 남편을 죽인 것 같아 자책감에 빠졌다. 친구에게는 물론 직장에서도 남편 자살을 꺼내지 못했다. “오죽 했으면 자살했을까”라며 색안경 끼고 자신을 바라볼까 겁났기 때문이다. 휴직하고 정신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자살 유가족 지원도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 포기했다.
K씨처럼 자살 유가족은 죄책감, 우울감, 왜곡된 생각, 두려움 등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교통사고나 질환으로 인한 사망과 달리 자살의 경우 유가족은 자신의 경험이나 정서 상태를 주위에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는데 소극적이다. 오히려 자살로 인한 가족상실 경험이나 감정상태를 부정하거나 숨긴다. 한 자살 유가족은 “교통사고를 당하면 ‘저런’이라고 하지만 자살했다면 ‘왜’라고 말한다”며 “엄밀히 유가족은 가해자 아닌 피해자인데 정말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삭히면서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자살 유가족이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차원 대책은 제자리 걸음이다. 관련 예산도 거의 없고, 이들을 관리해야 할 자살예방센터와 정신건강증진센터 역할도 미비하다. 한 관계자는 “보건복지부가 올 해 처음으로 1억 원 정도 예산을 들여 자살 유가족 관련사업을 했는데 ‘자살 유가족 지원 체계 확립을 위한 기초연구’와 자살유가족 자문단 위촉 등에 썼다”고 했다. 그는 “기초 연구는 유가족 참여가 저조해 연구결과가 언제 나올지 모르고, 한국자살예방협회의 자살 유가족 관련 사업도 이벤트성이 강해 실제로 자살 유가족에게 별반 도움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자살예방만 집중…유가족 관리 전무
국내에서 그나마 자살 유가족에게 실질적으로 도움 주고 있는 곳이 전국 시ㆍ군 자살예방센터와 정신건강증진센터다. 하지만 이들 기관 중 자살 유가족사업을 진행하는 곳은 15개에 불과하다.
인력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자살 유가족사업을 진행하는 15개 기관 중 담당자가 1명인 기관이 7곳에 달했다. 담당자가 2명인 기관은 5곳, 3명인 기관은 1곳, 4명 이상인 기관은 서울시ㆍ수원시자살예방센터 등 2곳에 불과했다. 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운영하는 유가족 자조모임에 참가 중인 유가족은 “자조모임에 가는 유가족들은 불안한 상태인데 모임을 담당하고 있는 상담사가 자주 바뀌어 모임이 제대로 운영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들 센터에서 일하는 정신보건전문요원의 지위가 불안하고 임금도 적어 사업이 지속되기 힘들다”며 “자살 유가족을 관리ㆍ상담하려면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 대부분 20~30대 여성 1~2명이 담당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유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자조모임이라도 활성화돼야 하는데 자살예방센터의 자살예방사업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자조모임 본래 취지로 운영되기보다 일정한 성과와 실적이 전제되지 않으면 모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상담과 치료에 집중된 자살예방정책에서 벗어나 지역 중심으로 자살예방정책을 펴야 자살 유가족이 도움 받을 수 있다. 박 교수는 “일본에서는 지역 중심으로 자살 유가족 관리 등 자살예방정책을 펴고 있다”며 “접근성 좋은 지역 복지관 등을 활용하면 자살 유가족이 더 많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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