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60% 육박… 렌치 총리 사임
‘反세계화’ 오성운동의 승리 평가
극단파 영향력 커지며 혼란 우려
‘이탈렉시트’ 가능성도 제기돼
마테오 렌치(41) 이탈리아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밀어붙인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렌치 총리는 투표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발표했으며 이탈리아 정정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국민투표 과정에서 급진좌파 성향의 제1야당인 ‘오성운동(M5S)’의 반(反) 세계화 드라이브가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탈리아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트럼프 신드롬’에 이어 반 세계화 흐름의 3번째 희생양이 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향후 이탈리아 정치 일정에서 오성운동이 부상할 경우 유럽의 정치지형은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개헌안 부결은 포퓰리즘 정당의 승리
이탈리아 선거관리위원회는 4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전역에서 치러진 개헌 국민투표 개표 결과 반대가 59.95%, 찬성이 40.05%(재외국민 투표 제외)로 집계됐다고 5일 밝혔다. 앞서 이탈리아 언론들은 4일 밤 출구조사 결과 반대표가 과반을 훌쩍 넘김에 따라 사실상 국민투표가 부결됐다고 발표했다. 개헌안 통과를 이끌었던 렌치 총리는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탈리아에 변화의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며 총리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렌치 총리는 5일 대통령에게 총리직 사임서를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렌치 총리는 앞서 2014년 취임 직후 경제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 등 친(親) 기업적 노선을 추진해왔지만 관련 개혁법안은 상원에서 번번이 부결됐다. 렌치 총리는 이에 상원의원을 현행 315명에서 100명으로 축소하고 대신 중앙정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개헌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날 개헌안 국민투표가 큰 득표율 차이로 부결됨에 따라 이탈리아 국민들이 반 세계화를 내세운 오성운동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성운동은 개헌 논의 과정에서 유로존 탈퇴와 리라화 복귀, 이탈렉시트(이탈리아의 EU 탈퇴) 등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우며 렌치 총리의 개헌안에 거세게 반대해왔다. AP통신은 “포퓰리즘이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이어 이번에는 이탈리아에서 렌치 총리를 사퇴시켰다”고 지적했다.
국민투표 부결 배경으로는 대량 난민유입과 청년실업 증가 등 고질적 병폐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의 누적된 분노도 직접적인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EU와 터키의 난민송환협정으로 그리스를 통한 유럽행이 막히면서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난민의 최대 유입국으로 전락했고 청년실업률은 40%에 육박하는 등 기존 정치권을 향한 이탈리아 국민들의 반감이 폭발 직전이었다. 상원 축소는 결국 렌치 총리를 비롯한 기성 정치권의 기득권 강화라는 국민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탈리아 발 금융위기 가능성 우려
국민투표 부결로 이탈리아 정국은 향후 상당한 혼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조기 총선이 불가피한 가운데 오성운동과 반 이민을 내세운 극우정당 북부리그(NL) 등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커지면서 오성운동의 집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이 적지 않다. 오성운동의 루이지 디 마이오 하원 부대표는 이날 렌치 총리의 사퇴 소식에 “오늘부터 오성운동이 (렌치 총리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며 집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오성운동은 집권 시 유로존 잔류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브렉시트에 이은 이탈렉시트 가능성 등 EU 불안의 또 다른 뇌관이 됐다는 지적이다.
특히 렌치 총리가 추진 중이던 부실은행 정상화 작업은 전면 중단됨에 따라 이탈리아 발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전했다. 렌치 총리는 국민투표가 통과될 경우 차기 경제개혁의 일환으로 몬테 데이 파스키 은행에 50억유로(약 6조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부실자산을 대폭 정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사임으로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5일 유로화 가치는 거래 초반 1.5% 하락 후 예상과 달리 금세 반등해 상승세로 돌아섰다. 독일계 투자회사 MPPM EK의 길레르모 헤르난데스 대표는 블룸버그 통신에 “금융시장이 브렉시트를 떨쳐내는 데 3일, 트럼프 당선 때는 3시간, 이탈리아는 3분이 걸렸다”고 꼬집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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