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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이겨낸 다이빙의 ‘거인’ 새미 리 옹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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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이겨낸 다이빙의 ‘거인’ 새미 리 옹 별세

입력
2016.12.0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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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 리 옹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새미 리 옹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계 미국 수영영웅인 새미 리 옹이 타계했다고 AP통신, AFP통신 등이 4일 보도했다. 향년 96세.

외신들은 새미 리 옹이 현지시간으로 2일 오후 8시경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한국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57cm의 단신이지만 미국 올림픽 역사는 물론 세계 다이빙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이다. 그는 28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던 1948년 런던올림픽 남자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우승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다. 4년 뒤에는 헬싱키올림픽에서도 같은 종목 우승을 차지해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다이빙 2연패를 이룬 남자 선수가 됐다.

당시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다이빙에서 인종차별과 편견을 딛고 이룬 업적이라 의미가 더 컸다.

그는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에는 수영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수영장 출입이 허락된 뒤에는 그가 훈련하고 나면 수영장에 물을 새로 받았을 정도로 당시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은 심했다. 그럴 때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한결같이 말했다.

“선조들의 인종적 배경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훌륭한 미국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인종 사회인 이 미국에 아시아인의 훌륭한 자질을 심어주는 것이 너의 의무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심판들의 편파적인 판정마저 극복하고 마침내 미국에서 다이빙 제1인자로 자리매김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학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고인은 1947년 미국 남가주대(USC)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입대해 선수생활을 이어간 뒤 이듬해 올림픽 무대 정상에까지 올랐다. 나아가 올림픽 2연패를 이뤘고 1953년 아시아계로는 유일하게 미국 내 최고 아마추어선수에게 주는 설리번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1960ㆍ1964년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을 이끌었고, 1984ㆍ1988년 올림픽에서 2회 연속 2관왕에 오른 그레그 루가니스 등 세계적 스타 선수들을 길러냈다.

미국 한인 사회에서 살아있는 이민 영웅으로 추앙 받아온 그는 2010년에 ‘제5회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2013년에는 한미우호단체가 주는 ‘올해의 미국 한인 영웅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새미 리 광장’, 웨스트모어랜드 애비뉴에는 ‘새미 리 박사 매그닛 초등학교’도 있다.

고인은 1953~1955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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