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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교활한 과학’인 정치가 위대해지는 길

입력
2016.12.0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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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영국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헨리 필딩은 말했다. “저잣거리의 속된 사람들은 배신, 속임수, 거짓말, 사기 등을 욕하고 경멸한다. 하지만 그들보다 위대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쳐서 정책이나 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약삭빠르고 부정직한 사람을 일컬어 ‘정치적인 인간’이라고 욕하는 건, ‘정치’라는 단어가 지닌 본디 뜻에 충실한 표현일 것이다.

새로 나올 아이슬란드 작가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의 소설 ‘부스러기들’ 인쇄 감리를 위해 파주로 가는 마음은 무거웠다. 설상가상 비 내리기 직전의 하늘은 먹장구름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쭉 뻗은 자유로 저쪽에서 빠르게 몰려오는 먹구름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그 소설 속 주인공이 떠올랐다.

남자는 젊고 성실한 금융맨이었다. 업무에 충실하되 경쟁하는 동료들만큼 사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해 승진에서 몇 번이나 물먹은 남자. 평범하고 모나지 않은 삶이지만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행복에는 늘 조금씩 못 미쳤다. 그럼에도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사소한 결함들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 만큼은 지혜로웠다.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어쩌면 나와 내 지인의 또 다른 얼굴.

그런 그가 아무도 모르게 트릭을 썼다. 자신이 손에 쥔 업무상 특권을 사적으로 조금 유용하는 수완을 발휘하면 됐다. 그로 인해 생겨날 선의의 피해자도 없어 보였다. 속임수를 통해 얻게 될 자신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 그는 출장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동선을 살짝 틀었다. 어린 쌍둥이 딸들과 아내를 동반한 출장길. 예약했던 비행기 표를 물리고 요트에 몸을 실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상은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선량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보 같은 이 남자는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다. 단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버린 배 위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위험에 빠지는 상황을 지켜보며 한순간 탐욕에 눈멀었던 스스로를 자책하고 저주했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자각 앞에서 그는 치를 떨며 울었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가족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속수무책 바라봐야 하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소심한 우리가 협잡과 배신, 사기와 교활함을 경멸하고 단속하는 건 이 때문이다. 고지식하고 정직하게만 살아서는 손해 보기 십상이라고 투덜대지만 어설픈 속임수와 정치적 판단이 불러오는 결과야말로 때로 치명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프로 정치인을 따로 뽑아 내세우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이해득실을 따지고, 거짓말을 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감수하는 일일랑 ‘위대한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정치가 ‘이익에 의해 조정되는 교활한 과학’임을 간파했던 헨리 필딩은 공적인 일에 나서는 정치인에게 누구보다 엄격한 도덕률과 이타심이 요구된다고, 그래야만 위대한 정치가로 거듭날 수 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이 대전제가 무너질 경우 세상은 끔찍한 지옥이 되고 만다는 걸 법률을 공부하고 한때 판사로도 일했던 필딩은 누구보다 뼈저리게 절감했다.

지금, 우리가 그 지옥도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민의 대리권을 사사로이 남발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권력자가 카메라 앞에 서서 단 한 번도 사사로운 욕심을 부린 적이 없다고 강변할 때 우리는 억장이 무너진다. 가당치도 않은 그이의 몇 마디가 정치판에 파문을 일으키고 약속됐던 합의마저 뒤흔드는 상황을 지켜보는 마음은 차라리 절망에 가깝다. 선량한 사람들은 오늘도 광장에 모여 희망을 노래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돌아가 지키고 북돋워야 할 일상이 있다. 힘겨운 과정을 돌파하는 동안 차곡차곡 쌓여 머잖아 흘러넘치게 될 우리의 슬픔과 피로는 또 누구에게 위로받을까. 정치란, 바로 이럴 때 위대함을 발휘하라고 만들어진 거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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