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스스로 입에 담을 것 같지 않았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이 나왔다. 비록 “국회가 정한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 담화에서 무작정 버티기 전략을 버리고 ‘조기 퇴진’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물론 꼼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의 거취라는 ‘폭탄’을 국회에 떠넘겨 달아오른 탄핵 정국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바람과는 동떨어진 담화였지만, 복잡한 정치적 셈법을 차치하면 대통령의 입장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1987년 6월 항쟁이 호헌(護憲)에 매달리던 전두환 정권의 입장을 변화시켰고, 결국 제5공화국의 종식으로 이어진 것처럼 역사는 작은 변화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변화를 만들어 낸 건 당연히 ‘촛불 민심’이다. 10월 29일 2만 명으로 시작한 집회 참가 인원은 5주 만에 190만 명으로 폭증했다. 실감이 안 나겠지만 190만 명은 어마어마한 인파다. 2015년 기준 울산시 인구가 114만 2,000명이고, 대전시 인구가 153만 6,000명이다. 한 개 광역시 인구보다 많은 19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는 얘기니, 그 위엄은 아무리 꽉 막힌 대통령이라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전국의 광장에 모인 국민들은 스스로 거리로 나왔다. 부끄러움, 자괴감, 책임감, 정의감, 절박함, 울분 등등 그들을 움직인 원동력은 다양하다. 등을 떠민 이는 아무도 없다. 다만 국민들이 더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동기를 부여해 준 사건들은 있었다.
미르ㆍK스포츠 재단 불법 모금 의혹에서 시작된 ‘최순실 게이트’가 ‘국정농단 사태’로 전환되고 급기야 헌정 사상 두 번째 대통령 탄핵안 발의 논의로 이어지기까지, 변곡점이 됐던 결정적 장면들을 살펴봤다.
장면 1) 미르ㆍK 스포츠 재단 통해 전면에 등장한 ‘최순실’
9월20일 한겨레신문의 ‘대기업돈 288억 걷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계기로 ‘최순실 게이트’는 시작됐다. 최초 보도는 TV조선의 ‘미르재단’ 의혹 제기였으나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 보도가 사실상 처음이다.
초기에 제기됐던 핵심 의혹은 ▦최순실씨가 미르와 K스포츠, 두 재단 설립의 막후에서 실질적으로 인사권을 휘두른 점 ▦전경련을 통해 800억 가까운 대기업들의 출연금이 순식간에 마련된 점 ▦신청 서류가 말도 안 되게 허술했지만 재단 설립 허가는 일사천리였던 점 ▦신생 재단들임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행사를 도맡아 진행한 점 등이었다.
재벌 자금 모금과 설립 허가, 청와대 행사 계약 등의 의혹은 핵심 권력이 뒤를 봐주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사실은 처음부터 박 대통령이 직접 연루된 권력형 비리가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엔 ‘말로만 떠돌던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며, 박 대통령과는 어떤 사이냐’는 점이 더 세간의 관심사였다. 2014년 11월 세계일보 보도에 의해 제기된 ‘정윤회와 문고리 3인방 등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이 흐지부지 마무리된 터라 ‘비선’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으로 바뀐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을 수사하던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박관천 전 경정이 “우리나라 권력 서열은 최순실씨가 1위, 정윤회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했던 발언은 다시금 회자됐다.
사실 초기부터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두 재단의 자금을 모으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청와대가 직접적으로 연루됐을 가능성은 높았지만, 국면을 이끌어가는 메인 타깃은 어디까지나 ‘최순실과 주변인’이었다. 그들이 두 재단과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챙긴 정황들이 10월 중순까지 이슈를 이끌었다.
최순실의 측근으로 꼽히는 인물은 차은택씨와 고영태씨다. 9월 말~10월에 걸친 국정감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문화계 황태자’로 통하던 차씨가 미르재단의 실세라는 점이 드러났고, 권력을 이용해 광고 기획사 아프리카픽쳐스와 플레이그라운드 등 자신과 지인의 사업에 특혜를 준 의혹들이 제기됐다. 고씨는 10월 중순 무렵부터 최씨의 행방을 쫓아 독일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시점에 등장했다. 최씨가 K스포츠재단을 사실상 개인법인처럼 이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더블루케이와 비덱 스포츠 등의 회사가 자금 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이 드러났는데, 고씨가 이들 회사의 이사로 근무하며 관리한 사실이 알려졌다. 고씨는 이후 중요한 국면 전환의 계기를 제공하는데, JTBC와의 인터뷰에서 ‘최순실씨의 취미는 대통령 연설문 고치기’라고 밝히며 단순한 이권 개입이 아니라 ‘국정 농단 사태’로 번질 불씨를 지핀 것이다.
장면 2) 특혜 : 역대급 ‘신의 수저’ 정유라가 키운 ‘흙수저의 난’
최씨의 딸 정유라씨와 관련된 여러 특혜 정황들은 사실 전부터 제기돼 왔다. 정씨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을 두고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당시 이 문제를 조사한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참 나쁜 사람’ 한 마디에 경질됐고, 이슈는 정씨를 비켜갔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열리자 정씨에 대한 특혜 의혹은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촛불 정국에서 ‘정유라 특혜’는 의미가 크다. 고교 시절 출석부터 이화여대 입학과 출결, 평가까지 쥐고 흔든 ‘전천후 특혜’는, 고통스런 입시 경쟁을 거쳐 대학에 가는 학생들 입장에선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부조리였기 때문이다. 몇몇 하이에나들이 권력에 기생해 돈 잔치를 벌인 건 ‘남의 집 일’정도로 혀를 차면 그만이지만, 정씨가 부모의 후광 덕에 누려온 현실 속의 특혜들은 ‘우리 집 일’로 다가온 셈이다.
안 그래도 평생단과대학사업 ‘미래라이프 대학’ 졸속 추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던 이대생들은, 권력에 놀아난 학교를 비판하며 투쟁 동력을 끌어올렸다. 교정에 모인 이대생들은 ‘최순실 게이트’ 이후 처음으로 비리에 맞서 대중이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장면 3) 농단 : 최순실에서 박근혜로… ‘판도라의 태블릿’이 열리다
10월 24일은 권력형 이권 개입 및 특혜 사건이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으로 급변한 날이다. 이날 오전 박 대통령은 개헌 카드를 꺼내 들며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물타기를 시도했지만, 같은 날 오후 8시 JTBC에서 방송한 ‘최순실 PC 파일 입수… 대통령 연설 전 연설문 받았다’는 보도는 국면을 완전히 바꿔놨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일개 민간인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검토하고 첨삭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을 허탈과 자조의 늪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게 나라냐”는 성토가 나왔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자괴감이 팽배해졌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최순실 PC’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25%(10월 셋째 주)였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JTBC 보도 이후 한 자릿수로 추락했다. 지난달 25일 발표한 11월 넷째 주 조사에선 사상 최저인 4%를 기록했다. 그만큼 ‘국정농단’의 파급력이 막강했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도 언론 보도 이튿날인 25일 첫 번째 대국민 담화를 통해 조기 진화에 나섰다. 그간 청와대는 ‘최순실 게이트’의 숱한 의혹에 대해 무시와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진화가 아니라 촛불에 불을 댕긴 꼴이 됐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씨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해 사실상 최씨의 국정 개입을 시인하며 도끼로 제 발등을 찍었다. 게다가 진정성 있는 사과 대신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변명과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는 감정적 호소를 늘어놓으며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질문도 받지 않고 녹화된 영상을 공개한 점도 크게 실망스러웠다.
연설문 수정뿐 아니라 고위 공직자의 인사나 통일ㆍ외교 정책 등 국가의 중대사도 최순실씨가 비선 모임을 통해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폭로가 이어졌고, 심지어 의상ㆍ주치의ㆍ헤어 디자이너에까지 최씨의 손길이 뻗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이 지경에 이른 대한민국을 보며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국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최순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국민을 기만하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부끄럽게 만든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것. 그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단 하나의 해법이 됐다.
장면 4) 촛불 : “이게 나라냐” 하야를 외치는 불꽃이 일다
2016년 10월 29일에 2만 명을 시작으로 타오른 촛불은,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며 들었던 촛불과는 사뭇 다르다. 2008년엔 ‘검역 주권’에 앞서 ‘먹거리 안전’이라는 삶과 직결된 문제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면 이번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법을 어기고 무능하기까지 한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의 대표로서 자격이 없다는 분노가 국민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런 점에선 촛불 대신 화염병을 들었던 1987년 민주화 항쟁과 닮았다.
처음에 국민들이 외친 구호는 ‘최순실 국정농단 규탄’과‘박근혜 퇴진’이었다. 퇴진의 구체적 방법론은 제시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책임총리’혹은 ‘2선 후퇴’ 등 박 대통령이 자리를 유지하되 권한을 이양하는 방식들이 논의됐다.
11월에 들어서면서 막연했던 ‘퇴진’구호는 ‘하야’라는 구체적인 방향성으로 거듭났다. 몇 가지 사건들이 배경이 됐다.
먼저 10월 30일 독일에 잠적해 있던 최씨가 돌연 자진귀국하며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수사 선상에 올렸다. 정치권에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등 야권 대선 주자들이 박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요구했다. 이 와중에도 박 대통령은 뚝심을 발휘했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국무총리에 전격 지명했고, 일부 개각을 단행하면서 자신이 여전히 행정부 수장임을 대외적으로 알렸다.
1차 대국민 담화 9일 뒤인 11월 4일, 박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2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이번 일의 책임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필요하다면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할 각오이며 특검 수사까지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달아오른 여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대국민 담화 역시 약발은 통하지 않았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11월 5일 2차 집회에 모인 20만 명의 인파는 입을 모아 ‘하야’를 외쳤다.
장면 5) 담화 : 검찰 조사 받겠다던 ‘거짓 담화’ 탄핵을 부르다
하야는 제대로 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물러날 의지와 판단력이 있을 가능한 해법이었다. 국민들은 박 대통령이 하야할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탄핵’과 ‘수사’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광장에 모인 국민 20만이 하야를 요구한 후 박 대통령은 김병준 국무총리의 지명을 철회하고 국회에 총리 지명 권한을 넘겼다. 정치권에선 책임총리에 적합한 인물을 고르는 데 관심이 쏠리면서 당장 비등했던 하야 여론은 한 풀 꺾이는 듯했다. 그러나 11월 12일 불타오른 ‘100만 촛불’은 정치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듯이 때론 준엄하게, 때론 흥겹게 ‘하야’를 외쳤다. 정치적 역풍을 우려해 탄핵에 미온적이던 야권에서 탄핵 논의를 본격화한 것도 12일 집회에서 국민의 뜻을 재확인한 뒤부터였다.
아이러니하게 탄핵 논의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박 대통령 스스로였다. 박 대통령이 선임한 유영하 변호사는 16일 “대면조사는 불가능하고, 서면조사를 원칙으로 해 달라”며 검찰 조사에 성실히 응하겠다던 국민과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저버렸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몰염치에 다시 한번 분노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의 말에 기대를 품었던 것에 또 한 번 좌절했다. 박 대통령은 하야도 퇴진도 없이 꿋꿋하게 버티겠다는 의지를 표현했고, 국민들은 스스로 물러날 뜻이 없다면 몰아내는 방법뿐이란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 와중에 박 대통령은 부산 해운대관광리조트인 엘씨티 비리사건과 관련해 “수사 역량을 총동원해 신속ㆍ철저하게 수사하고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해 연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라”는 지시를 내려 야권을 겨냥한 역공을 감행했다.
태블릿 PC가 세상에 공개된 후 박 대통령의 정치적 역공은 번번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메랑이 돼 여론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버티겠다고 나선 박 대통령 앞에 탄핵 여론이 힘을 얻었고, 정치권도 탄핵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시민들도 평화 집회 대신 불복종 운동이나 비폭력 저항 운동 등 더 청와대를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1월 19일과 26일 집회에선 광화문에서 나아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까지 촛불 영역을 넓혔다. 특히 5차 집회인 26일엔 190만 인파가 운집하는 헌정 이래 최대 규모의 집회 참가 인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0만 명의 위엄 앞에서도 박 대통령의 카드는 변하지 않았다. ‘하야’를 피하기 위해 ‘검찰 수사’를 내밀더니, 11월 29일 3차 대국민 담화에선 ‘탄핵’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나섰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명예퇴직 하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박계와 야권의 분열을 노린 세 번째 담화는 이전과 달리 효과를 보고 있다. 새누리당은 1일 탄핵 대신 ‘내년 4월 퇴진ㆍ6월 대선’을 만장일치로 당론 채택했고, 야권 역시 비박계 이탈로 탄핵안 가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할 것을 우려해 당초 세웠던 ‘2일 탄핵안 국회 발의’ 목표는 사실상 무산된 상태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이 같은 행태는 국민들의 분노를 더욱 고조시켰다. 평화시위만 하니 정치인들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 시위를 여의도에 가서 하자 등 분노의 외침이 인터넷은 물론 거리에서도 나오고 있다. 매주 소중한 주말을 반납하는 국민들의 분노를 정치권이 어떻게 수렴하느냐에 박근혜 대통령의 운명이 걸려 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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