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마음대로 하던 때와 달라
시대 상황 변화에 자조하듯 기록
언론관 추궁에 사전준비일 수도
“시대가 바뀌었다. 언론이 정부를 강제하고 통제하는 시대이다.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려고 한 일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김기춘(77)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자신을 둘러싼 ‘5대 의혹’ 외에 또 다른 자필 메모(추정)에 기재한 내용은 이렇다. 현 시점에서 그는 왜 이런 ‘언론관(觀)’을 잠언 형태로 정리해 둔 것일까.
메모 내용은 그간 알려진 김 전 실장의 인식과는 정반대라고 할 만하다.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수첩에는 그가 언론을 ‘통제 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내용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국무총리 후보자 연속 낙마 사태가 있던 2014년 7월 초,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김 전 실장은 “허무맹랑하고 불합리한 일방적 지적, 비판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언론중재위 제소,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 청구 등 상응하는 불이익이 가도록 철저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청와대에 호의적인 보도를 염두에 둔 듯 “VIP(대통령) 관련 보도-각종 금전적 지원도 포상적 개념으로”라는 발언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근과 채찍을 통해 권력이 언론을 길들이려는 의도와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읽힌다.
이랬던 김 전 실장이 돌연 정부에 대한 ‘언론의 우위’를 시인하는 메모를 남긴 것은 뜻밖이다. ‘최순실 게이트’를 밝혀낸 게 수사기관이 아니라 언론이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권력 마음대로 언론을 주물렀던 유신시대와는 180도 달라진 시대 상황을 자조하듯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조만간 닥칠 검찰 수사나 국정조사에 대비, 자신이 공식적으로 내세울 기본 입장을 정리한 것일 수도 있다. 언론관을 문제 삼는 추궁에 대응하기 위한 사전 준비의 일환이라는 얘기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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