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평생 별별 난리를 다 겪어봤지만, 요즈음 겪는 난리는 좀 이상하다. 내 기분이 내내 불쾌한 거다. 이 불쾌한 기분이 영 가시지 않는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 오죽하면 몇 달 전 계획했던 2박3일 여행도 취소해버렸을까. 수수료를 내고 내년으로 연기했다. 여행할 마음이 가셔버려서 이번 여행은 취소했지만, 사회와 약속한 일마저 내 기분대로 무를 수는 없다. 어렵사리 써가는 글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시설보다 평소 살던 내 집에서 나이 들어가며 사는 게 좋겠다고, 그리고 그리 사는 게 대세라고 썼다. 그러면 늙도록 내 집에서 살다가 마지막이 오는 그때, 어디서 끝을 내야 할까. 마지막 즈음, 운신이 어려워질 그 즈음 대개 병원으로 가는 게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일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삶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내는 사람이 무려 70%나 된다는 통계가 있다. 지난 20여년간 거의 30%가 늘어난 결과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10년 내 95%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을 태세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을 병원보다는 익숙하고 정든 자신의 집에서 보내는 게 요즘 대세란다. 지금은 100세 시대다. 100세 가까이 오래 사는 노인들에게는 죽음도 서서히 찾아 오게 마련이다. 치명적인 병으로 죽어가는 젊은 사람은 치료도 해야 하고 처치도 해야 한다. 하지만 노쇠해서 서서히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노인에게는 병원보다 정든 집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는 간병을 받는 게 필요하다. 병원은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치료의 공간이지만, 집은 사그라져 가는 몸의 돌봄을 받는 곳이다. 병원은 죽음과 싸우는 공간이지만, 집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치료보다 간병이 필요하고 정든 사람들과의 이별이 필요하다. 병원에서 죽음은 패배라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본 의사 나카무라 긴이치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의사를 멀리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집에 있으면 원치 않는 의료 개입을 막을 수도 있다. 전에 여기서 얘기했던 것처럼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아툴 가완디 예일대 의대교수)
말이 쉽지, 집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어떻게 손 놓고 볼 수 있겠나, 우리 시대의 가족은 죽음을 경험할 기회가 많지 않다. 친척 수도 적고 멀리 떨어진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죽음을 볼 기회도 병원 말고는 없다. 그래서 ‘죽는 건 병원에서’라는 생각이 보편화돼 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어가는 노인의 간병은 며느리가 도맡아 했었다. 미국 철학자 메리 데일리가 “선택할 수 없는 간병은 강제노동”이라고 갈파했듯, 요즘 세상에 누가 죽어가는 노인 간병을 며느리에게 맡길 수 있으랴.
서서히 찾아 오는 고령자의 죽음의 현장에는 의사가 필요 없다. 방문 간호사도 없어도 된다. 진짜로 필요한 사람은 간병 전문인이다.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가 쓴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이란 책을 보면, 초고령사회인 일본에는 임종관리사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가족의 불안을 달래고 가족의 고통에 공감하는 한편 가족이 혼란스러워 할 때 적절히 대처하면서 평안한 맘으로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이끈다. 출산을 돕는 조산원이 있듯이 죽음을 돕는 조사(助死)원인 셈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집이 임종 공간이 된 거다. 이것이 가정 호스피스다.
이런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비용이 필요하다. 일본은 l8년 전 ‘간병보험’이란 공제제도를 기적과 같이 도입했단다. 간병보험이란 기본적으로 ‘가족의 간병부담을 줄여서 가능한 만큼의 부담만 지도록 하는 것’이다. 집에서 죽을 때 드는 비용이다. 임종관리사 혹은 간병인의 교육과 양성 그리고 간병보험의 보급이 시급한 시점이다.
죽음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남기는 마지막 교육이다. 좋은 죽음이나 나쁜 죽음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