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구료. 한평생 집세 치르느라고 죽도록 일하고, 결국 내 집이 되면 그 집에 살 사람이 없단 말이오.”(이순재) “인생은 언제나 그런 거예요.”(손숙)
28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세일즈맨의 죽음’ 연습실. 이순재(81) 손숙(72) 두 노배우의 정확하면서도 힘 있는 ‘딕션’으로 극이 시작된다. 드라마와 연극의 가운데쯤 선 자연스러운 연기는 조카뻘 제자들과 합을 맞추는 ‘카드 게임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야구복을 갖춰 입고 20대 패기를 연기하는 30대 배우들 앞에 선 노배우들은 특별한 분장 없이 훌쩍 50대 중년으로 돌아간다.
“연기를 하다 보면 어떤 작품으로 우뚝 설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위에 늘 다른 세계가 있죠. 연기는 정상은 없고 정상이 없다는 그 보람으로 하는 겁니다. 항상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죠.”
배우 이순재의 데뷔 60주년 기념작 ‘세일즈맨의 죽음’이 12월 13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현대 희곡의 거장 아서 밀러의 대표작인 ‘세일즈맨의 죽음’은 평범한 가장 윌리 로먼을 통해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의 잔해 속 허망한 꿈을 좇는 소시민의 비극을 그린 작품. 1949년 초연과 함께 연극계 3대 상인 퓰리처상ㆍ연극비평가상ㆍ앙투아네트상을 모두 수상했다.
이순재는 이날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60주년이)작년에 지난 줄 알았는데 주변에서 올해라고 공연 하나 작은 걸 하라고 해 ‘60주년’을 앞에 붙인 것”이라고 연신 쑥스러워했다. “내 나름대로 중간 정리를 하는 의미에서 뭘 할까 고민했고 그러다가 ‘세일즈맨의 죽음’이 떠올랐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경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인데 특히 우리 정서에 잘 맞습니다. 부부, 부자관계가 동양적이라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죠.” 그가 첫 연극 출연료를 받은 작품도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이순재는 “1978년 이 작품하고 처음 받았는데 얼만지 아직도 모른다. 봉투를 열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기념공연은 지난해 잡지 ‘한국연극’에서 이순재를 인터뷰했던 김태훈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의 제안으로 제작됐다. 김 교수는 “지금의 배우정신과 연기 패러다임을 진지하게 논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며 “손숙(린다 로먼 역) 이문수(벤 역) 등 이순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연극인들이 함께 모여 공연을 제작했다”고 소개했다. 아들 비프와 해피 역을 맡은 배우들은 모두 10여년 전 이순재가 세종대 영화예술학과에서 강의할 때 가르쳤던 제자들이다./
윌리 로먼 역은 이순재에게 이번이 네 번째다. 1978년, 2000년에는 김의경 연출 무대에 출연했고 2012년엔 김명곤 연출이 원작을 한국화해 만든 ‘아버지’에서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다. 40대에 이 작품을 처음 연기했던 이순재는 “그때는 이해 못하는 부분도 있었고. 연기도 완성되지 않았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연극인 30인이 배우 이순재에 관해 쓴 ‘더욱더 건강하게 끝까지 가자’(가제)도 출판된다. 12월 15일 출판기념일에 다큐멘터리 ‘우린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부릅니다’가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상영된다.
앞으로 얼마나 더 무대에 설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저희 작업은 암기력을 전제해야 한다”며 “텔레비전은 당일치기 녹화가 많은데 5번 ‘죄송하다’ 말할 때 되면 스스로 그만 둘 겁니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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