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등 민중가요 가수 등장
‘저항의 1분 소등’ 행사로 절정
“싸움 대상인 불합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건 당연한 권리입니다.”
26일 오후 6시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 노란색 폴리스라인 앞에 유모(29ㆍ여)씨가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경찰이 시위대를 가로막자 ‘독서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손에 쥔 책은 나치 독재체제 하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담은 ‘나치의 병사들’. 유씨는 “경찰이 범죄자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막는 모습이 마치 책 내용과 같아 선택했다”며 “정의를 무력으로 쟁취할 순 없지만 온몸으로 불복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5차 촛불집회에서는 참가자 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분노도 저항도 어느 때보다 거세졌다. ‘축제’가 아닌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도 많았다. 광장의 시민들은 행진으로, 구호로, 유머로 부당한 권력을 향한 불복종 운동을 이어갔다.
이제 촛불 만으로는 안된다
적극적 저항의지는 사전집회에서부터 감지됐다. 오후 1시 서울광장에서 열린 시민평의회에는 궂은 날씨에도 150여명의 참가자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무리 촛불을 들어도 꿈쩍 않는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 내리기 위한 행동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직장인 최요섭(32)씨는 “상시 국민투표제를 도입해 국민 의견이 직접 반영돼야 한다”고 했고, 장소현(40ㆍ여)씨는 “직접 민주주의로 대정부 투쟁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시각 서울광장 한 편에는 ‘시민불복종행동’ 소속 회원 10여명이 참가자들에게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21조를 적는 ‘헌법피켓 만들기’를 진행 중이었다. 모임을 만든 대학생 엄재희(27)씨는 “4차 집회 당시 누군가의 저항의식이 담긴 스티커조차 뜯겨 지는 모습을 보고 ‘과도한 비폭력 프레임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며 “국민 저항권을 일깨우기 위해 이벤트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구호도 한층 수위가 높아졌다. 박 대통령의 범죄 혐의가 속속 드러나면서 하야나 탄핵 같은 단순한 퇴진방식이 아닌 ‘구속 수사’를 통한 사법처리를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김모(40)씨는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이 의무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대통령의 온갖 비리가 드러난 지금이 딱 그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모(19)씨는 “박대통령의 범죄가 명백한 상황에서 무조건 기다리지 말고 사법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체포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날 오후 대구 동성로에서 열린 대구시국회의에서 방송인 김제동은 “국가기관 권력을 남용한 대통령을 즉시 내란죄로 처벌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가족ㆍ이웃 손잡고 연대한 시민들
질서 있는 저항의 중심에는 초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광장을 지킨 평범한 시민들이 있었다. 이날 시민들은 두꺼운 패딩점퍼와 목도리, 그리고 가족 이웃 친구의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로 추위를 녹였다. 최승희(42ㆍ여)씨는 “오늘 안 나오면 ‘역시 추위 하나에 쉽게 꺼지는 촛불’이라고 무시할 것 같아 어머니와 딸 손을 꼭 붙잡고 참여했다” 고 말했다.
본 집회에 등장한 안치환, 양희은 등 ‘민중가요’ 세대 가수들의 노래도 시민들의 저항의식에 불을 지폈다. 안씨가 대표곡 ‘사랑은 꽃보다 아름다워’를 개사한 ‘하야는 꽃보다 아름다워’를 열창하자 시민들은 하나가 돼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부르는 양씨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일부 참가자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주창희(75)씨는 “‘끝내 이기리라’는 노랫말이 오늘처럼 와 닿는 날이 없다”며 “젊은이들이 거리에 쏟아져 부도덕한 정권을 꾸짖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든다”고 말했다.
150만의 연대는 마음으로 응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획한 ‘저항의 1분 소등’ 행사로 절정을 맞았다. 오후 8시 정각이 되자 요란한 함성이 가득했던 광화문광장은 일순간 암흑과 정적에 휩싸였다. 시민들은 ‘해뜨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 다가 오고 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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