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컨버터블(지붕이 개폐되는 차)은 쌍용자동차의 ‘칼리스타’이고, 두 번째가 기아자동차의 ‘엘란’이다. 영국에서 처음 제작된 차를 한국 기업이 인수해 생산했고, 국내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게 둘의 공통점이다. 사람으로 친다면 이주민인 셈이다.
이중 엘란은 한국 최초의 정통 스포츠카다. 모태는 경량 스포츠카의 지존으로 인정받는 영국 브랜드 로터스다. 기아차는 로터스의 기술이전을 받은 뒤 1,100억원을 투자해 1996년부터 엘란 생산에 나섰다.
총알을 닮은 엘란은 2인승이었다. 기아차는 ‘크레도스’에 사용하던 1.8 가솔린 엔진을 개량해 넣은 뒤 국산화한 수동 5단 변속기와 궁합을 맞췄다. 성능은 최고출력 151마력에 최고 속도 220㎞/h, 시속 100㎞ 가속에 걸리는 시간은 7.4초였다.
엘란에는 다른 자동차들와 달리 ‘백본 프레임’이 적용됐다. 등뼈 역할을 하는 굵은 틀(프레임)을 중심으로 생선 가시 같은 프레임이 붙었고, 사각형 보조 프레임이 추가됐다. 그 위에 강화섬유플라스틱으로 만든 차체가 올라갔다. 공차중량은 1,070㎏에 불과할 만큼 가벼웠다.
지붕은 손으로 천을 말아 접어 넣어야 하는 완전 수동식이었다. 헤드램프는 차체 안에 숨겨져 있고 작동할 때만 밖으로 나왔다.
기아차는 오직 달리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기아차를 이끈 김선홍 회장은 엘란과 관련, “주행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는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돌을 넘어가는 것도 알아챌 수 있는 미세한 느낌, 엔진의 우렁찬 소리, 배기가스의 휘발유 냄새, 빠르게 흐르는 주변 풍경”이 스포츠카를 타는 재미라는 게 김 회장의 지론이었다.
당시 몇 차례 엘란을 시승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탁월한 코너링이었다. 빠른 속도로 굽은 길을 빠져나가는 주행이 힘차고 안정적이었다. 마치 차의 한 가운데를 핀으로 고정시키고 돌아나가는 느낌이었다. 20년 넘게 자동차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이 같은 경험은 많지 않았다.
기아차와 라이벌이었던 현대차는 치열한 신경전도 벌였다. 기아차는 원래 ‘엘란2’라는 이름을 검토했지만 현대차가 ‘엘란트라’와 비슷하다며 문제 삼을 조짐을 보이자 엘란으로 결정했다. 엘란보다 몇 달 전 나온 현대차 ‘티뷰론’과도 티격태격했다. 기아차는 티뷰론을 “일반 승용차”라고 깎아 내렸고, 현대차는 “엘란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티뷰론이 훨씬 더 많이 팔린다”며 응수했다.
서해공업이 완전 수제작으로 만든 엘란은 생산 초기엔 하루 1대를 출고하기도 어려웠다. 96년 7월 생산을 시작한 엘란은 2000년 1월 단종 때까지 총 1,055대가 생산됐다.
오토다이어리 편집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