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돼” 턱없는 소리만 골라 하는 아이에게 해줄 말은 이것뿐이다. “학교 안 가면 안 돼? 동생 다른 집에 주고 오면 안 돼? 고양이 키우면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전부 안 될 것들뿐이다. 황인숙 시인이 독자를 괴롭히는 방식도 이와 같다. 신간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에 담긴 시들은 “안 돼”를 무한히 유발한다.
“가장 따뜻한 데를/ 추위도 안 타는 시계가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기억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비쩍 마르고 오들오들 떠는 것들을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열정이니 고양감이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시니 음악이니 존재니/ 행복감이니 다행감이니”(‘고통’ 일부)
시인은 가장 따뜻한 곳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놓고 싶어한다. 이 당연한 소원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에 시인은 어리둥절하다. 그렇다. 시계는 따뜻한 곳이 필요 없다. 그래도 안 된다. 아무도 청소기 대신 고양감을 택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인은 현실의 불가능함을 이해해줄 생각이 없다. 그 이해 때문에 “비쩍 마르고 오들오들 떠는 것들”이 죽었다. “지난 겨울 당신이 주동이 돼/ 지하실 문을 잠갔다/ 고양이들이 굶어 죽으라고/ 바깥에 나간 새 생이별을 한 어미고양이들이/ 그 안에 든 새끼고양이들과 좁은 창살을 사이에 두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 고물거리던 작은 털복숭이들이 사체가 돼 뒹군다/ 당신들 영혼의 지하실” (‘당신의 지하실’ 일부)
시의 배경은 2013년 강남 한 아파트에서 실제로 일어난 길고양이 생매장 사건이다. 고양이들이 다니는 지하 통로를 막아 아기 고양이 수십 마리가 아사했다. 바스라진 털가죽과 흩어진 뼈 앞에서 우는 시인에게 배설물이나 소음 이야기를 꺼낼 생각을 하면 절로 표정이 고약해진다. 그래도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시인도 잘 알고 있다. 생계니, 집 값이니, 먹고사니즘이니, 다 안다. 연민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도,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도 다 안다. “어제도 그제도 오셨으니/ 내일도 오실 거죠?/ 모레도 글피도, 언제까지라도 오실 거죠? (…) 아니야, 아니!/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눈빛// 차라리 얼른 저버릴까/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약속/ 가슴 저미네/ 영원히는 뛰지 못할 내 가슴”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약속’ 일부)
그러나 사랑에 가슴 뛰는 한, 연민에 신이 나는 한, 그 약속을 지레 저버릴 필요는 없다. 올해로 시력 32년, 어느덧 예순을 눈 앞에 둔 시인은 이제 지나온 날보다 남은 날을 세는 게 더 편해졌다. 그럼 조금 더 고집 부려도 되지 않을까. 아니 이제 본격적으로 떼써도 되지 않을까. 못다 한 사랑이 아직 너무 많다면.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송년회’ 일부)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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