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이권에 대통령 직접 개입” 공무원들 배신감
“검찰조사 등 국가기능 깡그리 무시” 실망감도 커
“내가 만든 정책이 최순실 일당에 이용당해” 분노도
이미 정권에 마음 떠나… 제대로 된 정책 나올리 만무
“정말 이러려고 공무원이 됐나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지 한 달, 경제부처 한 공무원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 말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공직사회가 정권 말 권력누수(레임덕) 현상과 측근 비리를 한두 번 겪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대통령이 직접 연루된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는 자존감으로 버텨온 공무원 사회를 비참한 집단으로 내몰았다.
‘공심’은 대통령을 떠났다
공무원들의 마음은 이미 대통령과 정권을 떠난 지 오래다. 무엇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한 개인(최순실)의 이권을 챙겨주려 각종 절차와 시스템을 깡그리 뭉개버린 것에 대해, 절차와 시스템의 수호자라 할 수 있는 공직사회의 충격은 크다. 교육부처 한 공무원은 “대통령의 비위도 놀라웠지만 국가기능을 부정하며 검찰조사에 응하지 않겠다는 말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책과 민원의 일선 현장에서 앞만 보고 달려 온 대다수 공무원들의 자부심과 자존감은 큰 상처를 입었다. 특히 대통령의 비위 때문에 공직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게 공무원들을 힘들게 한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한 간부는 “나라의 정책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국민의 믿음이 깨졌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기획재정부의 한 과장도 “밖에서 이미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우리가 무슨 정책을 내놓는다고 한들 누가 그 진실성을 믿어주겠느냐”며 허탈해 했다.
헌법이 신분을 보장하는 직업공무원을 “이 사람이 아직도 있느냐”며 옷을 벗긴 대통령의 처사(문화체육관광부 간부 사퇴)도 공직사회의 허탈감을 증폭시켰다. 경제부처의 한 중견 직원은 “공무원 역시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마음이 떠난 정권을 위해 몸을 던져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지금 정권 하에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발한 정책이 나올 리도 만무하다. 경제부처 국장급 공무원은 “당장 일을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별로 없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감정적으로 상당한 동요가 있다”고 토로했다.
흔들리는 공직사회의 미래
특히 각 부처 현장에서 정책을 직접 생산하는 중추인 사무관 등 젊은 공무원들의 상실감은 더욱 큰 문제다. 공직사회의 미래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경제부처의 한 사무관은 “옆 부처에서 장관이 갑자기 잘리고 또 다른 부처에서 과장 5명이 직위해제 당하는 등 납득하지 못했던 인사의 퍼즐이 이제서야 맞춰진 느낌“이라며 “선배들이 속속 관료 조직을 떠나 민간으로 옮기는 이유가 단지 금전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던 소위 ‘성골’ 출신 선배들에 대한 실망감도 상당하다. 관료 출신 청와대 수석이 재벌회장에게 협박 전화를 하고,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최순실 재단 모금 과정에 총동원되는 등 엘리트 공무원의 ‘부역행위’가 검찰수사에서 낱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 세종시 부처의 사무관은 “청와대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거쳐야 할 필수 코스로 인식돼 오던 것이 사실“이라며 “청와대의 일처리가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지금 누가 청와대에서 근무하겠다고 손을 들겠느냐”고 말했다.
휴일까지 출근하며, 밤을 새면서 내놓았던 정책들이 국정농단 세력에게 이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탈해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 경제부처 사무관은 자신이 담당했던 일이 이번 게이트와 일부 관련이 된 것으로 언론에 보도가 되자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충실히 이행해서 성과를 낸 것뿐인데, 거기에 그런 배경이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자조감 섞인 얘기도 잇따른다. 중앙부처의 한 사무관은 “화가 나지만 나 또한 부당한 지시를 받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하는 관료조직의 문화가 개선되지 않은 문제점도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신뢰 회복해 전화위복 삼자
깊은 실망 속에서도 공직사회가 가능한 빨리 이 충격을 추스르자는 목소리도 많다. 정권은 곧 생명을 다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정부와 국가는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닥에 떨어진 정책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이석환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국민이 반응하지 않으면 정책이 의도한 효과를 낼 수 없다”며 “정책의 내용도 좋지만 일관성을 유지해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행정부에 대한 청와대의 과도한 개입과 간섭을 통제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견도 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뒤집어 생각하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오히려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공무원 조직의 진가를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커졌다는 측면도 있다”며 “부처별로 상황에 맞게 필요한 정책을 스스로 생산하고 입안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세종=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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