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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 속으로 떠나요

입력
2016.11.2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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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돼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주름이 지고 녹이 슬고 색이 바래 더 아련한 것들이다. 우린 그 허름함에서 시간의 깊이에 빠져들어간다. 한국관광공사는 ‘12월의 가볼 만한 곳’으로 간이역 여행을 추천했다. 공사가 선정한 간이역은 경기 양평의 구둔역, 강원 태백의 철암역, 충남 논산의 연산역, 전북 군산의 임피역 등이다. 사진첩 흑백사진 속에 담긴 오래된 추억을 꺼내보는 것 같은 설렘을 간직한 간이역들이다.

양평 구둔역

구둔역. 한국관광공사 제공
구둔역. 한국관광공사 제공

80년 가까운 세월이 묻어나는 곳이다. 퇴역한 노병처럼 주름 깊은 은행나무 한 그루, 엔진이 식은 기관차와 객차 한 량, 역 앞을 서성이는 개 한 마리가 구둔역의 친구다. 1940년 문을 연 이곳은 중앙선 복선화 사업으로 종전 노선이 변경되면서 2012년 열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으로 남았다. 구둔역의 빛 바랜 역사와 광장, 철로, 승강장은 등록문화재 296호로 지정됐다. 삐걱거리는 대합실 문을 열고 들어가 승강장과 철길을 서성이는 모든 동선이 근대 문화를 더듬는 행위와 연결된다. 구둔역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애틋한 첫사랑의 배경이 되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태백 철암역

철암역 선탄장. 한국관광공사 제공
철암역 선탄장. 한국관광공사 제공

철암의 번영과 쇠퇴를 기억하고 있는 역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처음 탄광이 개발되면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철암마을이다. 1940년 철암선 개통 이후 황금기를 맞게 된다. 당시 철암의 집세는 서울보다 높았다고. 하지만 에너지원이 달라졌고 잇단 폐광에 철암은 죽은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4만5,000여명이 흥청거렸던 철암의 거리는 지금 3,000여명 밖에 안 되는 인구로 줄어들었다. 당시 철암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곳이 철암역. 석탄으로 번성하던 시절을 웅변하듯 4층 건물이 우뚝 섰다. 역사 건너편 철암거리 일부가 철암탄광역사촌으로 만들어져 외부인을 맞는다. 2014년 2월 태백시가 철암천변에 남은 건물 11채를 외부는 그대로, 내부는 전시관으로 고쳐 개방한 곳이다.

논산 연산역

연산역. 한국관광공사 제공
연산역. 한국관광공사 제공

호남선 연산역은 대전과 논산 사이에 있는 간이역이다. 하루에 10회 정도 열차가 서지만 그나마 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급수탑이 있다. 화강석을 원기둥처럼 쌓아 올리고 철제 물탱크를 얹었는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48호로 지정됐다. 연산역에서는 다양한 철도 문화 체험도 가능해 주중에는 유치원 아이들이, 주말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쓸쓸한 간이역이 활기 넘치는 시간이다. 연산역에서 가까운 논산 돈암서원과 관촉사 등이 둘러볼 만하다.

군산 임피역

임피역. 한국일보 자료사진
임피역.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제가 약탈을 위해 세운 역이다. 임피역은 1924년 군산선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1936년에는 보통역으로 승격하고, 역사도 새롭게 지었다. 지금의 역사는 이때 지은 것으로, 서양 간이역과 일본 가옥 양식이 결합됐다. 2008년부터 역사는 열차 대신 관광객을 맞는다.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대표작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 등을 모티프로 한 조형물이 들어서고, 객차를 활용한 전시관도 생겼다.

한편, 관광공사는 23일 ‘12월의 가볼 만한 곳’으로 경북 청도의 신거역을 포함해 발표했다가 다시 제외시키는 해프닝을 빚었다. 신거역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불리는 곳의 열차역이다. 간이역의 정취보다 새마을운동의 향수를 찾는 이들에게나 적당한 역이다. 역 주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과 대통령 전용열차를 비롯 새마을운동 상징들이 즐비한 곳이다. 공사 측은 “선정에 따른 논란의 소지가 있어 제외시켰다”며 “앞으로 선정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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