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5시59분께 일본 후쿠시마(福島)현 앞 바다에서 규모 7.4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일본 열도가 공포에 휩싸였다. 대부분이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평일 새벽시간 대에 6년 전인 2011년 3월11일 도호쿠(東北)대지진의 트라우마가 다시 강타한 것이다. NHK는 즉시 재난 상황을 전국에 보도했다.
지진 상황은 지구 반대편에 있던 최고 정치지도자에게도 즉시 전달됐다. 아르헨티나를 방문 중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지진발생 17분만에 재해대책에 전력할 것을 지시한 뒤 오전 7시쯤 NHK 화면에 나와 쓰나미(지진해일) 경보가 내려졌다는 긴급 상황을 알렸다. “저는 국민에게 해일 피난정보를 적시에 정확히 전하는 것, 빨리 피해상황을 파악하는 것, 재해비상조치에 전력투구할 것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에게 직접 거듭 지시했습니다”라는 아베 총리의 말은 잠에서 깨어난 일본 국민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일본 정부의 대응도 기민했다. 지진발생 3분만인 오전6시2분 총리관저 위기관리센터에 관저연락실이 설치됐고, 이후 지진 규모가 큰 것으로 밝혀지면서 쓰나미경보까지 내려지자 43분 뒤인 오전 6시45분 연락실은 관저대책실로 승격됐다. 스가 장관은 오전 7시30분께 기자회견을 갖고 “후쿠시마에서 최대 90cm의 쓰나미가 관측됐다”며 “후쿠시마 제2원전 3호기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의 냉각시설이 정지됐지만, 연료유출 문제는 없다”고 궁금증을 풀어줬다. 같은 시각 후쿠시마, 미야기(宮城)현 등의 해안가에선 소방당국과 관청, 경찰 등이 차량을 동원해 요란하게 대피방송을 하며 주민들을 깨웠고, 상당수가 질서있게 이동해 학교나 높은 건물로 대피할 수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은 오전 7시59분께 재가동됐다.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의 대응은 한국과는 크게 달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시 첫 보고를 받은 후(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53분) 7시간이 지난 오후 5시 15분에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했다.
또 일본 국민에게 2011년 대지진의 기억을 끄집어낸 요란했던 이날 상황은 선제적인 초기대응에서 마치 거대한 대비훈련을 방불케 했다. 도쿄에서도 수초간 강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비상국면은 오전 6시 NHK 긴급방송과 함께 시작됐다. “동일본대지진 당시를 상기하라, 쓰나미가 온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급히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연신 반복됐다. 오후 들어 SNS 등에선 “아침 NHK방송이 너무 무서웠는데 좀 심한 것 아니냐” “긴급히 대응토록 해 효과가 좋았지만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며 부작용을 호소할 정도였다.
실제 이날 지진은 1만5,873명이 죽고 2,744명의 실종자가 발생한 도호쿠대지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당시는 오후2시46분이었지만 이날은 새벽이어서 대피시간으로도 취약했다. 다행히 실제 해안에 도착한 쓰나미가 최대 1m40cm가량으로 당초 예보된 최대 3m에 미치지 못하면서 대형참사는 피했다.
현장상황은 다급했음에도 비교적 침착했다는 평가다. “우선 대피하라”는 긴급메일이 전송되자 진앙에서 가장 가까운 이와키 니시키히가시(錦東)초등학교 3층 교실에 주민과 어린이 30여명이 바로 모였다. 어업협동조합의 요시다 가즈노리(吉田和則·65) 이사는 “조합이 보유한 어선을 즉시 확인했다”며 “쓰나미에 더 안전한 먼 바다쪽으로 대피한 배도 있었는데 2011년 경험 덕분에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교도(共同)통신에 전했다.
이날 지진으로 도호쿠신칸센 등 철도운항이 일시 중단되고 센다이공항에선 항공기 30여 편이 결항됐다. 또 주민 수천 명이 피난했으며 간토(關東)지방에서만 260여개교가 임시휴교했다. 하지만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일본 기상청은 “향후 1주일 정도는 같은 규모의 지진발생 가능성이 있다”며 여진을 대비할 것을 당부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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