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대선후보 당시 공약인 ‘늘지오’(늘리고 지키고 올린다)는 그 자체로는 거의 나무랄 데 없이 우리나라 노동시장 문제의 핵심과제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겠다는 것이 애초의 발상이었다. 적어도 말로는 그랬다. 정권의 임기를 1년 남짓 앞둔 현재, 안타깝게도 노동시장 문제의 해소도 사회적 대화의 활성화도 모두 신기루처럼 우리 곁을 떠나가 있는 상태다.
현 정권의 행태나 성과와 무관하게 그러한 과제와 방법론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포기할 수 없다. 현재 한국은 미래에 지속 가능한 고용체제의 구축을 정말 과감하고 혁신적으로 도모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다. 이에 크게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면서 그들이 잘 결합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길게’ ‘가늘게’ 그리고 ‘다 함께’로 요약할 수 있다.
이미 법적으로 정년이 60세로 정해지면서 ‘길게’ 일하는 시대의 첫발은 내디딘 셈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정년은 국제비교상 낮고, 노령빈곤의 심각성은 매우 큰 상태다. 필자가 작년에 수행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에 참여한 근로자들의 약 60% 이상은 정년연장이 ‘가계경제의 안정을 위해서’ 가장 필요하다고 답했다. 연금 등 노후재원이 불안한 중고령자들에게 같은 기업, 같은 직종에서 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길게’의 이상만 추구하다 보면 청년고용 창출기회를 해칠 수 있기에, ‘가늘게’의 방법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고령자들의 고용을 연장시키되 임금과 노동시간을 적정하게 줄여가는 방식을 택하고, 그 재원을 청년고용에 활용케 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임금체계와 직무를 유연하게 재구성하는 법도 필수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가늘게’에는 ‘유연하게’의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물론 그것이 ‘불안정하게’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 허나 작년에 필자가 수행한 기업체 설문조사 결과, 주요 업종의 직무를 유연하게 하고 근로시간을 조정하는 식의 방안이 중요하다고 답한 기업들은 10%대에 불과했다. 그만큼 현장은 난감한 상태라는 것이다.
‘다 함께’의 정신은 고령자 고용기회 연장과 청년 고용기회 확장의 과제를 동시에 사고해, 두 세대가 노동시장에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를 갖는다. ‘다 함께’에는 또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 바로 고용시스템을 개혁하는 과정이 여러 이해당사자들과 폭넓고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다.
노동시장 개혁은 생산현장의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속한 나라에서 정부가 일일이 개입해 기업의 관행을 바꾸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타당성도 약하다. 정부는 큰 틀에서 그러한 개혁의 배양자 내지 촉진자로서 역할을 해 주면 된다.
이른바 ‘9ㆍ15 대타협’과 같이 정부가 사회협약의 방식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개혁이라는 길고 복잡한 여정의 아주 첫걸음에 불과했다. 정부와 여당은 그 중 소수의 민감한 내용을 임의로 취사선택하거나 자의적으로 변형시킨다는 노조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일부 개혁수순을 급하게 강행하려다 결국 협약체제 자체의 붕괴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의 교훈은 우리 사회의 절실한 과제인 고용체제의 재설계가 노사관계와 사회적 대화의 활성화를 고려하지 않고 제대로 나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개혁을 성취해 내는 정부의 능력은 정책추진 의지에 더해 어떻게 개혁의 과정에 이해당사자들이 동참하고 관계의 혁신이 도모되는 식으로 방법을 찾아낼지에 절대적으로 달려있다.
기성 노조에 환상을 갖고 기대려고만 해도 잘못이지만, 노조를 죄악시하고 배제하고 으름장 놓고 굴복시키는 식으론 노동시장에서 ‘길게’ ‘가늘게’ 그리고 ‘다 함께’의 이상이 원활히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향후 그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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